[초록물고기] 산업화 속에 퇴색된 '가족의 의미'
기사입력 1997년 02월 05일 17시 05분
한국영화의 찬란한 여명. `초록물고기'는 외국영화의 무차별 폭격과 영화진흥공사에 대한 무지몽매한 인사 등 온갖 악재로 허덕이는 한국영화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어둡고 음울한 이 시대를 얘기하고 있지만 답답한 영화인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주었다. 한국적 느와르. `초록 물고기'에 모여든 면면만으로도 이미 심상찮은 결과는 감지됐었다. 심혜진 명계남. 그리고 여균동감독이 프로듀서, 강우석감독이 배급을 맡아, 이창동 감독을 지원했다. 82년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 93년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문학상을 받았던 소설가. 영화경력이라고는 93년 `그섬에 가고 싶다'의 조감독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업이 전부인 이 감독에게 젊은 영화의 실세들이 왜 그렇게 난리를 치고 법석을 떨었을까.
이 감독은 `초록 물고기'에서 산업화와 함께 점차 퇴색돼가는 가족의 의미를 그리려고 했다. 이 연출의도는 숨죽이며 영화를 보는 동안 생생하게 전달된다. 제대와 함께 사회로 튀어나온 막동（）. 군복무기간 동안 신도시로 변해버린 고향 일산을 뒤로 한 막동은 우연히 만난 영등포 밤무대의 가수 미애（심혜진）의 주선으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조직폭력배 보스 배태곤（）의 수하로 들어간 막동은 `밤의 법칙'에 부딪혀 순응해가기도 하면서 순수한 젊음을 조금씩 잃어간다. 배태곤의 정부 미애와 나누는 위험한 사랑에서 막연하게나마 살아있음을 느끼는 막동. 막동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일산의 고향집과 영등포의 밤세계는 대비를 이루면서도 기묘하게 하나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처럼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데 모여 가진 야유회는 `초록물고기'의 상징적 장면. `가족들과 함께 모여 식당을 하는 것'이 꿈인 막동은 인위적인 화목이라도 가슴으로 느끼려고 하는데 이도 쉽지 않다. 가슴이 시리다. 배태곤을 위해 상대편 보스 김양길（명계남）을 칼로 찌르고난 뒤, 막동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공포를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잊으려 한다. "성, 기억나. 있지도 않은 초록물고기를 잡는다면서 뛰어다니다가 `쓰레빠' 빠트리고 하루종일 찾아다니던 거…."
어느덧 잊어버린 바로 엊그제의 추억과 순수. 영화를 보는 동안 몇차례 뜨거워지던 눈시울은 끝내 이 대목에서 가슴이 찢어지고 만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보편적인 기대를 비켜가던 이 감독은 막동의 죽음조차도 그토록 믿었던 배태곤과 미애를 통해 확인시키며 `허무의 극치'를 보여준다. 에필로그는 또 어떤가. 막동은 가고 없고,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우연히 들른 손님, 남산만한 배를 안고 들어선 미애와 배태곤. 무심히 오가는 이들의 모습과 막동의 기억을 되살려낸 미애의 오열에 또 한번 연민이 솟구친다. 이감독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봐주길 원했지만 관객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올해 나올 영화중 놓쳐서는 안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