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이야기] 마음의 거울 (2)

기사입력 1997년 01월 28일 14시 45분

한참 얘기한 후 갈 때가 되자 정말 돈을 안내도 되느냐고 미안해 했다. 괜찮으니 그냥 가라고 돌려 보낸 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책 두 권과 편지 한 통이 날라왔다. 자칭 `날라리 환자'라고 소개한 그 편지에는 그 날의 사담 이후, 우유부단했던 자신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저 거울같이 환자의 뜻을 반영한 것 뿐인데, 환자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가 됐나 보다. 또 얼마전에는 동경의 어떤 여성으로부터 전화 상담 요청이 왔다. 저녁 시간으로 약속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녀는 쉽게 자기 문제를 털어놓지 않았다. 그냥 힘들다고 하며 지금 독한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그 때 문득 나도 술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맥주 한 캔을 꺼내와서는 한모금 들이켰다. 짜릿하고 시원한 맥주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면서 면담이 다시 시작됐다. 알딸딸한 가운데 얘기는 부드럽게 진행돼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맥주가 다 비워졌다. 나는 다시 양해를 구하고 맥주를 한 캔 더 갖고 왔다. 그렇게 또 40분 정도 얘기하니까 전화로 할 말은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동경에 한번 놀러오라고 했고,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일본 사람들 틈속에서 살면서 그런 모호한 약속에는 질렸다고 하며 구체적으로 답해줄 것을 기대했다. 나는 다음에 연락주겠다고 하고는 일단 면담을 끝냈다. 이것이 제대로 된 면담일까? 나는 목소리가 예쁜 여자와 술한잔 하며 그냥 사담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곧 면담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절반 이상 남아 있는 맥주를 세면대에 쏟아버렸기 때문이다. 속도 나쁜데 괜히 혼자 술을 찾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술을 끌어당긴 것은 그녀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독주를 마시고 있는 여성을 점잖게 대한다는 것은 거울 역할이 아니다. 이 기회에 일본이나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떠올랐지만 선뜻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 날 밤 꿈을 꾸었다. 방이 많은 허름한 집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아이를 만나는 꿈이었다. 나는 다음날 비자를 내고 이틀 후에는 동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