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비안 나이트]
기사입력 1996년 09월 25일 13시 28분
레퍼토리가 거의 바닥이 나거나 졸리면 할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옛날 이야기 듣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사는 겨."
그러나 나중에 가난하게 살거나 말건 우리는 지금 당장 자장가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치 않았는가 말이다.
허나 옛날 할머니들께선 `재미있는 이야기'를 "빵이 떨어 졌는데 그 안에 잼이 들어 있었어. 어때? 잼있는 얘기지"'식의 동음이어식의 말장난 개그에 능하시지 못했다. 해서 그냥 기왕의 메뉴를 재탕삼탕 나중에는 삼십탕 쯤 하셨다.
모든 할머니가 이야기꾼은 아니셨다. 인근 동네에까지 널리 깜찍한(?) 재치를 인정 받으신 내 할머니는 패러디 기술을 발휘해 이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슬며시 각색해 들려 주셨다.
나는 오늘 할머니의 증손자가 될 내 파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줘 호평을 받았다. 옮기자면-,
"이걸 이미 들은 홍길동전이라 하면 안돼.
왜냐면 뉴홍길동전이거든. 하루는 길동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길 `아버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
'이러는 데 아버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윽고 말하길 `길동아! 너의 아픔을 이해하겠노라.
오늘 이후로 호부호형을 허락 하노니…,'그러자 길동 다시 아버지께 간곡히 말하길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한 이내 처지는 단장의 아픔이거늘…'하자
길동의 아버지는 얘가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으면 이럴까 싶어서 입을 떼 말하길 `그래 호부호형을 허락하노라! 마음껏 외쳐도 좋으니….'
그런데도 길동은 다시 말하길 `아버님을 아버님이라 하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 하지 못하매….
'길동이 아버지는 좀 이상했어.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그래서 호부호형을 허락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타일렀어.
그런데도 길동의 입에서는 녹음된 이 소리가 반복되는 거야.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는 이내 처지가….' 열을 받은 아버지 `이놈아! 호부호형을 허락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 한번만 딴 소리 하면 머리통을 납작해지도록 쥐어 박고 말테다.
어때? 아직 할말이 있냐?' 라며 분기탱천하셨지.
그런데 길동은 또 다시 `말씀은 알아 듣겠는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매….' 이러자 아버진 경고대로 길동의 머리통을 납작하게 쥐어 박았고 그는 마치 전처럼 찌그러졌는데
그래서 홍길동전이 된거야…한자공부는 필요한 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