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소설] Love Love Love......이규형(96)
기사입력 1996년 09월 12일 15시 09분
**물장사 이야기 (32)
남다른 데가 있는 남자였다.
"핸드백 여기 두면 위험합니다. 이 지역엔 소매치기가 많아요.".
그는 빠른 말투로 옆의 의자에 놔둔 그녀의 핸드백과 쇼핑가방을 가리키곤 성큼성큼 사라져 갔다.
별로 크지도 않고 아주 뛰어난 용모도아닌데 무척 인상적인 남자다.
스물 일곱여덟이나 됐을까? 가죽 점퍼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자신감 넘치는 음성과 밝고 건강한 걸음걸이를 지녔다.
그녀가 고맙다는 목례를 하며 의자위의 물건들을 손에 쥐었을 때는이미 저멀리 휙휙 멀어져 가버린 뒤였다. 겨우 말 한마디만 뿌리고 간청년이었지만 확실하게 자기 인상을 심어주는 지라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외국에서 한국말 하는 남자를 보아서 그런가.’ 그녀는 잠시 후코트깃을 여미고 일어섰다. 쇼핑을 하려면 빨리빨리 서둘러야겠다. 그녀가 갖고 온 여행서엔 여자용품 선물은 누가 뭐래도 거리라고 씌어져 있다.
가이드 없이 혼자 여행하는 그녀로선 지난 며칠간 이 책 신세를 톡톡히 졌다. 책에 씌어진대로, 아까 이 거리를 좀 걸어보니 쇼핑하기엔최고였다.
입이 짜악 벌어지게 비싼 물건들과 화사한 상점들이 어느쪽으로 걸어도 줄줄이다.
문제는 괜찮은 가게가 너무 많아서 판단이 안선다는것이었다.
그녀는 모레 서울로 가야 되는 만큼 오늘 오후가 아니면 물건을 사러 다닐 시간이 없다. 내일은 아침부터 일어나 교외에 있는 베르사유궁전에 갈 계획인 만큼 짬이 없는 것이다.
그녀에겐 프랑스제 물건들을 꼭 사야하는 이유가 있다. 지난 1년‘케네디’를 하는 동안 그녀에게 충성을 다한 가게 여자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선물을 하고 싶어서다.
그 여자들은 물론 그녀가 요번에 가게를 새로 오픈하면 모두가 그녀 휘하로 들어올 여자애들이다.
그녀는 혀를 내두르면서 거리를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미쳤니!너무 비싸! 보석류, 여자시계류는 숨도 못쉴 정도로 엄청나게 비싸다.한국돈으로 계산해보면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꼭 한자리가 많다.
그렇다고 옷이랑 구두같은 걸 사가기엔 그 부피를 감당할 수가 없다.
여행책엘 보면 이 근처 어디에 쇼핑하기에 최고인(가격면에서)면세점들이 있다고 지도까지 그려져 있는데 그녀는 원래 전혀 지도를읽는 능력이 없다.
억지로라도 방향감각을 잡으려고 그녀는 눈앞에 계단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건물을 보았다.
그 유명한 하우스다.
"여기에서 거리로 걷다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하우스를 찾아보는데 요번엔 아까 못봤던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 그녀에게 소매치기 주의를 주고 성큼성큼 사라졌던 사내가 우뚝서 있는 모습. 그녀의 착각인지 이 젊은 남자는 도대체 가만히 서있는 모습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이른 봄의 허공에다 엷게 김을 내뿜으며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죄송합니다만 혹시, 이 근처 면세점 어디 있는 지 아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