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무정]<제19화>대륙의 기인들(27) ♣
기사입력 1996년 09월 11일 14시 16분
이소야는 철타파를 상대할 기색이 아니다. 그냥 묵묵히 외면해 버린다. 철타파의 시비는 멈추지 않았다.
"내 흉칙한 용모를 보고도 넌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단 말이냐? 내 안광에서 뿜어지는 살기를 넌 의식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냐?"
이소야는 여전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소야. 철타파는 그의 뒤통수를 보며 내심 욕설을 퍼붓다가 흠칫 놀란다.
`이놈은 중년인이 아니다.'
이소야의 뒷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때, 선두는 어느 폐허의 장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안개가 점차 걷히고 있는 가운데 규모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폐장이 드러났다.
구석구석에는 깨어진 기왓장과 잡초가 우거져 있었지만 한때의 웅자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황금사원의 본궁(本宮).
강호무림을 위진(威震) 시켰던 일대문파가 바로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황보백령은 참담한 기분이 되어 장원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남궁도가 그녀의 심사를 어루만져 주었다.
"피는 더 이상 보지 맙시다. 원수는 원수를 낳는다고 하지 않소. 지난 세월의 고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소만》 황보소저는 복수의 념(念)을 승화시켜야 할 것이오. 어쩌면 지하에 계신 분들도 바랄 일인지도 모르오."
황보백령은 벽천무상검 남궁도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내는 왜 이렇게 순진할까? 그는 세상을 푸르게만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같아. 만일 이 사람이 내 음모를 간파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갑작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황보소저의 웃음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군요."
교성과 함께 나타난 모용추. 그녀는 시원한 눈동자로 황보백령을 응시했다. 황보백령은 외면했지만 모용추는 집요했다.
"두 분은 아주 잘 어울려요."
남궁도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난 그저 황보소저가 우울해 보여서…."
"남궁대협의 변명하는 모습은 평소와 달리 당당하시지 못하군요. 나는 별다른 뜻으로 방해한 것이 아니에요. 다만, 황보소저가 매우 아끼던 경호원을 떼어버린 이유가 있었다는걸 깨닫고 그걸 말해주고 싶었을 뿐인걸요."
황보백령은 열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낀다. 피가 갑자기 거꾸로 흐르는 기분.
"날 격동시키는 이유가 어디 있는거죠?"
당연히 황보백령의 목청은 싸늘했다. 모용추는 이미 계산되어 있었다.
"감정에 빠져있지말고 어서 봉황의 계곡이나 개방해!"
황보백령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후원의 끝으로 걸어갔다. 중인들은 모두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까마득히 높이 솟아있는 천상(天上)의 벽(壁). 놀랍게도 대리석처럼 웅장한 벼랑의 이 장 높이 부분에는 봉황문(鳳凰門)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게 아닌가.
벽천무상검 남궁도가 봉황시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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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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