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의 ML 메시지]
기사입력 1996년 09월 10일 14시 56분
지난 주 필라델피아 원정을 갔을 때 생긴 일이다. 나는 일찍 구장으로 가기 위해 좌완 투수 레딘스키와 함께 오후 2시30분쯤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탔다. 보통 7시에 경기가 열리면 팀 버스가 4시에 호텔을 떠나지만 개인 훈련을 하려는 선수들은 일찍 택시를 타는 일이 빈번하다. 어떤 도시든 호텔에서 구장까지는 택시로 10분 남짓 걸린다.
그런데 택시 운전사가 평소 가던 길이 아닌 고속도로를 타면서 문제가 생겼다.
고속도로가 주차장처럼 완전히 막혀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다음 출구에서 내려야 하므로 중간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옆에 앉은 레딘스키가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일찍 가서 개인 훈련을 하려고 하는데 길이 막히니 신경질이 났다.
그런데 레딘스키가 도가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며 50세는 넘었을 그 운전사에게 마구 욕을 해대고 신경질을 부리자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요즘 젊은이 중에는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인사성도 없고, 제 멋대로인 아이들이 많다는데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미국에 온 것은 물론 야구를 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방 예의지국인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리라는 뜻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는 경기중 마운드를 물러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미국 욕을 한 것이 TV 카메라에 잡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반성을 했었다. 시즌 중 에서 양복 사건이 났을 때도 조금만 참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두고 두고 남는다. 나는 내가 원해서든 아니든 한국을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수양하는 기분이고 더 힘들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우리 미풍 양속을 이네들에게 알리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면 안된다는 각오를 자주 다지고는 한다. 코치들이 나를 아껴 주는 이유 중에 하나도 내가 예의바르고 그들을 존경하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 선수들처럼 코치나 감독 앞에서 마구 욕을 섞어 가며 말을 하거나 아니면 대들고 싸우는 일을 나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우리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도 않는 일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내가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불펜 코치인 마크 크레시의 아들이 놀러 왔다가 아버지 앞에서 욕을 섞어 가며 말하는 것을 보고 "너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에서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욕을 듣는다"고 말해주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녀석은 이해를 하지 못하며 그것이 아버지가 없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어른에게는 항상 예의와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크레시 코치는 곁에서 흐뭇한 표정이었지만 그 녀석은 영 못 알아듣겠다는 투였다. 미국에 온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갈수록 문화적인 차이를 많이 느낀다. 그리고 미국인들 속에 묻혀 살면서 나 자신도 여러 면에서 미국화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우리의 좋은 예절과 풍속을 지킬 뿐 아니라 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나의 또 다른 책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