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소설] LOVE LOVE LOVE......이규형(47)
기사입력 1996년 07월 23일 13시 54분
+++++ 아름답고 따스한 사랑(9) +++++. 옆에 놓아두었던 연애소설 위를 어떤 모자가 덮고 있다. 서울역에서이곳까지 내려오는 동안 좌석을 사수하기 위해 5시간 동안 놓아둔 책이다.그런데 그 책 위로 예쁜모자 하나가 살짝 얹혀져 있는 거다. 그는 눈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리본달린 밀짚모자를 만져봤다.
말할필요도 없이 여자의 것.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세상 어느 여자가 이 밤에 미쳤다고 남자 잠자는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모자를 던져 놓은 채 자리를 뜨겠는가?. 곧 종착역 부산이라 밤열차안의 좌석들은 반이상 텅 비어있지 않은가.그는 모자를 들고 급히 기차복도를 달렸다.
열차는 5시간을 넘게 달려이제 몇분 후면 부산역도착, 그녀는 어디서 탔었는지 모르지만 분명 이기차안에 있다는 얘기다. 기차 칸칸을 살피며 헤쳐나갔다. 숨바꼭질해봤자 갈 데가 없다. 깜짝 놀라게 하는 취미가 있는 여자라 하지만 설마 기차칸 지붕위에서 앉아가고 있는건 아닐 테지.
앞에 칸들을 전부 살핀 그는 이제 반대쪽으로달리듯 헤쳐간다. 없다. 없다. 계속없다. 드디어 최종칸 기차 맨뒤 마지막 문을 열었다. 저쪽 창문에 어떤 여자가 돌아선채 바깥 풍경을 보고있다. 그는 우뚝선 채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반대편에 돌아서있는여자를 보며 짜릿한 감격을 느꼈다. 얼굴을 볼 필요가 없다. 금빛머리칼인 거다. 멕 라이언은 몇초후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보다간 방긋 웃어왔다. 조마조마하고 가슴 조이던 술래잡기가 끝났다. 여태까지의 모든 스트레스와 조바심 신경질이 그녀의 소리없는 웃음하나에 녹아버렸다. "언제 탔습니까?". "후후 그런 영화 아세요? 당신이 잠든사이에.
구포역에서 탔어요.전 어제 이미 부산에 내려 왔거든요. 삐삐녹음을 듣곤 시간 맞춰 기다려탔는데 콜콜 잠들어 계시던라구요". 그는 말인즉슨 부산역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종점 한정거장 전인 구포역에서라도 타고 그와 함께 경부선 밤열차를 탔었다는 기록을 남기고싶었다고 한다. 두사람은 새벽 부산역 경사진 길을 내려오며 마치 3년3개월쯤 사귄사이처럼 웃고 떠들었다. 지난번엔 정말 너무 어처구니 없어 웃음밖에 안나왔다며 피차 아쉬움을 호소했다. 꽁지머리와 클레오파트라 머리사건.어찌 생각하면 그때 그런 이유로 엇갈려 못 만났기 때문에 인상이 깊게박혀 오늘 이처럼 허물없이 대화가 되는지도 모른다. "부산에 누구랑 같이 내려왔습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남자하고야 같이 왔겠느냐마는 여자친구랑 같이 왔다, 그래도 낭패이긴 마찬가지. 그의 꿈이 깨지는 순간인거다. 아까 낮에 죽치고 연애소설 볼 때부터 그의 몸안에 멕라이언을 껴않고 싶다는 사랑의 전류가 강하게 충전돼 있다. "친구랑 같이 왔는데 빠이빠이 했어요, 서로의 자유로운 시간을 위해서". 옳지! 그는 자유로운 시간이라는 의미를 자유로운 연애라 해석하며쾌재를 불렀다.
선생님! 근사한 밤 되십시오. 자기누나를 소개시켜준 제자녀석은 학교에서 그렇게 말하며 킬킬대지 않았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