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형옴니버스소설]
기사입력 1996년 07월 20일 14시 44분
** 아름답고 따스한 사랑(6)
** 기차는 출발했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불안한 스타트였다. 토요일의 부산여행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만약 비행기였다면 이런 불안한 출발은 안했을 것이다. 일주일쯤 예약이 가능했을 터이니깐.
그런데 이놈의 기차라는 건 표를 직접 사러가야한다. 뭐 그럼 토요일 수업 끝나고 빨리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막상 서울역에서 새마을호 우등칸표를 달라니깐 신음소리를 내윽었다.
새마을호가 없는 게 아니라 무궁화 통일호 전부가 매진인거다.
이럴수가… 아예 표가 없다는 데는 할말이 없다. 숫제 표가 두장에 1백만원입니다, 그랬으면 보너스달 봉급을 생각하며 샀을 것이다. 장미빛인생에 배팅한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안가면 안되는 데요. 집안에 일이 생겨 오늘 꼭 내려가야해요."
그는 역무원 눈치를 살피며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통일호 9시 29분이요."
새마을호를 생각했는데 통일호라니. 첫 데이트를 폼나게 하려던 꿈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에 떠내려 갔다. 이대로라면 과연 요번 만남이 성립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그는 통일호 9시 29분 열차 티켓을 받아 쥔 채 공중전화를 찾았다.
메시지로 받은 삐삐번호에 대고 기죽은 강아지 목소리로 음성녹음을 담았다. "죄송합니다. 지난번의 그 사람입니다. 표를 사긴 샀는데 통일호라서…죄송합니다. 9시 29분 밤열차입니다. 기차 좌석번호는…."
내심 불안하다. 하지만 이젠 도리가 없다. 제자녀석 집에 또 전화를 해서 그녀가 올지 안올지 확인해 보고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건 얼굴팔리기 그지없다.
무슨 선생이란 작자가 그렇게 촉새처럼 나불거리나 그러면 할말이 없다.
그는 시간을 죽여야했다. 이제 겨우 오후 2시. 영화를 봐도 3편을 봐야 기차시간까지 심심하지 않을 장시간의 여유. 영화를 보고 뭔가먹고 찻집에서 뭉기적다가 다시 대합실에서 주간지나 스포츠신문을 통독하는 게 이런 기다림의 대체적인 순서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긴 싫다. 여름 오후에 역광장에서 그는 고민에 불탔다. 그녀가 과연 올까하는 고민과 그녀를 만나기전까지 무엇을 해야할까 하는 고민.
그는 걸어서 시내 서적센터 밑에 들려 책장을 쭉 훑어봤다. 보통 때는 동-서양소설들을 비롯하여 역사자료들을 많이 샀다.
그러나 우리끼리의 얘기이지만 오늘은 연애소설 때문에 왔다. 농후한 내용들이 있는 소설이 보고싶다. 그는 몇권의 연애소설들을 주머니에 꽂은 채 일단 커피 한구석에 틀어박혔다.
이걸 다 보면 농후한 영화를 보자. 선생도 때로는 이런 소설과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는거란다. 제자들아.
밤 9시 29분. 그는 자신의 좌석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기차는 출발했다. 그리고 그녀는 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