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소설] LOVE LOVE LOVE......이규형(42)
기사입력 1996년 07월 18일 15시 39분
//////// 아름답고 따스한 사랑 (4) /////////. 40분쯤 흘렀을 때는 이미 포기상태가 됐다. 드넓은 호텔 커피숍 안을 살피며 여자들마다 슬금슬금 훑었다. 깨어진 사제관계.
스승과제자사이의 신의는 오늘 땅에 떨어졌다. 누나를 소개시켜 준다하고 선생을 호텔커피숍에서 빌빌거리게 만드는오늘날의 제자들. 괘씸한 생각을 하면서 커피숍을 살피는데 저쪽 창가자리 여자와 또 눈이 부딪쳤다. 무지막지한 미인인데 자꾸 눈길이 마주친다. 그가 보기엔 그녀 역시 아까부터 누굴 기다리는 듯한데 끔찍하게 예쁜 여자였다.
한가지분명한건 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여자라는 사실. 그녀는 완벽한 금발이었다. 물론 금빛으로 염색을 한 것이겠지만 그게 어색하지 않고 `프렌치 키스'의 멕 라이언을 연상시키는 귀여움과 아름다움이흠뻑 배인 한국의 멕라이언은, 잠시후 커피숍을 나갔다. 그도 이십분 뒤 딱 한시간을 채우고 비운의 커피숍을 퇴장했다. 이 자식을 반쯤 죽이리라. 너만은 믿었는데...수많은 제자녀석들이친척여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했을때도 거부했었다.
한데 이 녀석이 사촌누나 얘길 할땐 왠지 숨이 팍 막힐 정도로 흥분되고 감이 왔다. 얘기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아름답고 따스한 여자임에 틀림없으리라는 확신까지 섰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 예감이라는 게 머리칼을쭈뼛서게 할 때가 있는데 그건 틀림없이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사건이 된다. 예를 들어 3수에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그의 대학입시. 학원에선 사학과를 치면 위험하니 똑같은 대학의 약간 커트라인이 낮은 과를 가는게좋겠다고 말린, 그 대학에서 비장의 본고사를 치른 것이었다. 대학시험장에서 수학시험 전 왠지 목구멍이 칼칼해지고 가슴이 뛰었다. 그리곤 머릿속에서 통계의 법칙 하나가 꺼림칙하게 왔다갔다 해댄다.그는 급히 수학정석을 꺼내 그 부분을 확인했다. 원래 수학이 싫은데다 이 부분은 복잡하기도 하고 이런 것까지 시험에 나오겠나 싶어 늘 그냥 넘어갔던 페이지. 5분 동안 급하게 외우곤 시험종이 울렸는데... 으악--. 수학시험지 맨 마지막 문제, 그것도 가장배점이 많은 그 문제가 바로 그 통계 공식을 활용해야 하는 것... 머릿속에 갓 스며있는 5분 전의 그 따끈 따끈한 공식을 그대로 조심스럽게 쏟아냈다. 그는 그해에 꼴찌에서 둘째로 합격한 사학과 신입생이되었다.
오늘날 역사선생이 된 건 말할 필요도 없이 그때의 수학시험문제 덕문이다. 그런식으로 요번 클레오파트라 머리의 애인 건도 똑같은 예감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쳐갔던 것이다. 딴 제자놈들이 여자소개 얘길 할 때는 같이 낄낄 웃어넘기곤 했지만이때만은 장난이 아니다. 놓치면 안된다는 신호탄이 골을 쏘았던 것이다. "야 이놈의 시끼, 넌 이제 끝이야.
네 인생의 3분의1을 내가 망쳐주겠어" "옛! 선생님 무슨 말씀! 선생님 안나갔지요? 우리 누나 30분 넘게 기다리다 돌아와 아까 신경질 내고 방방 떴어요!". 그는 집으로 돌아와 제자 녀석에게 전화했다가 녀석의 첫 마디에 머리가 띵해졌다. "저기 혹시 금발염색한 여자 못 봤어요?". "그 여자가 우리 사촌누나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