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가 쓰는 ML메시지]
기사입력 1996년 06월 25일 16시 58분
**겸손한 로 새출발 지난 20일 리글리 구장의 클럽하우스에서 발생한 일은 지금 생각하면 상황 판단을 잘못한 나의 흥분으로 빚어진 아쉬운 사건이었다. 값진 승리의 기쁨으로 들떠 있던 나는 내가 아주 아끼는 정장이 조끼와 반바지로 변한 것을 본 순간 극도로 분노가 치솟았었다. 동료들이 루키에게 행하는 입단식 같은 절차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나를 시기하는 누군가가 일부러 옷을 잘랐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나는 있는대로 분풀이를 해댔고,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각됐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상황을 정확히 전해 듣게 되면서 나는 동료들에게 사과를 했고, 대부분 이해를 해주며 다음번 다시 더욱 `살벌한 입단식'을 할 것이라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알고 보니 에서는 신인 선수들에게 그런 짓궂은 장난을 전통적으로 해 오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이 메이저리거가 되는 통과 의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캐로스도 루키 시즌에 옷이 3벌이나 못쓰게 됐다고 했으며, 아스타시오는 아끼는 가죽 점퍼가 걸레처럼 됐다고도 했고, 지난 시즌 3루수이던 윌 클락은 1천달러도 넘는 고급 장화에 오물들을 가득 담아 망가뜨린 일도 당했다고 한다. 3년째 미국 야구를 하고 있지만 이곳의 풍습을 다 익히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놈들! 내 성격을 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섣불리 까불지 않겠지'하는 생각도 속으로 들기도 했지만, 이번 사건은 오해로 인한 명백한 나의 실수인 것 같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날 그 순간에 분을 참지 못해 난폭한 행동을 벌인 것이 창피하기도 하다. 다행히 그날 사건으로 `한국 선수'가 운운되지 않고, 루키 투수 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사건 정도로 수습된 것이 천만 다행이다. 또한 그 사건을 겪으면서 루키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등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솔직히 사과를 한 때문인지 현지 언론에서도 호의적인 기사들을 써 주었고, 그 사건 덕분에 미국 주요 언론들이 나를 대서특필하는 엉뚱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뛰어난 선수로 커 나가는 길은 운동장에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는 더욱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시 한국 선수는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는 말을 듣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