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애욕의 소용돌이(15)

기사입력 1996년 06월 25일 14시 59분


**"공주는 끝내 말이 없었소" 햇살은 눈부셨다. 이소야는 고스란히 대지의 맑은 빛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는 고야공주의 유리관 옆에서 밤새도록 마치 말뚝을 박은 양 요지부동. 고야공주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것일까?

무현왕자를 비롯한 족의 남녀노소는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소야는 사실 고야공주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자(亡者)를 위한 행동은 분명히 남과 다르니 그는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촌장이 이소야의 인품에 감동해 크게 울먹였다.

"대협의 예기치 않은 조문에 우리 공주님께서 몹시 기뻐하시고 이제서야 편안하게 이승을 떠나셨을 겁니다."

이소야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고야공주는 끝내 말이 없었소. 날 원망했는 지도 모르오."

촌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명복을 비는 마음이 진실하다면 그 넋은 은(恩)과 원(怨)의 세계와는 무관한 영원의 공간에서 오직 순수한 영혼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무현왕자도 이소야를 위로한다.

"어쩌면 고야공주의 영혼이 소야를 불러 들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 생각이 옳다면 이제서야 공주는 진정 자유러울 수 있을거야."

이소야는 침착히 대꾸했다.

"그럴까요?"

"소야를 기다렸을 테니까."

"그렇군요."

이소야는 표정없이 말한다. 매우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이 순간처럼 그 얼굴이 잘 어울리는 상황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무현과 이소야는 촌장이 정성으로 준비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촌장이 슬그머니 궤 하나를 이소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이소야의 질문에 촌장이 미소를 띄었다.

"열어 보십시오."

궤안에는 마치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채찍이 들어 있었다. 까맣게 윤이 흐르는 채찍의 길이는 아홉자에 달했다.

"이 채찍의 이름은 묵린향(墨麟香)이라 부르는 데 몽고족의 기병(奇兵)으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보물입니다. 도검(刀劍)으로도 흠집을 낼 수 없을 만큼 단단할 뿐 아니라 부드럽기는 버들가지 이상이지요. 또한 사용할 때마다 강력한 향기가 주변을 진동한답니다."

이소야는 극구 사양했으나 촌장은 막무가내였다. 계속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일단 승낙을 하고 마는 이소야.

"훗날 원하신다면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소야가 묵린향의 손잡이를 잡자 갑자기 한 줄기 청량한 기운이 손끝으로부터 스며들어 사지백해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루말할 수 없는 쾌감. 외부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온 건 이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