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 불타는 애욕의 허무한 종말
기사입력 1996년 06월 12일 16시 32분
##-김갑수 열정적 러브신 ##세트미학-리얼리티 돋보여 사는 게 고행인데, 사랑인들 고행이 아닐 수 있을까. 그래도 이 고행은 사서 한다. 안보면 보고 싶고, 만나면 서로를 탐하고 희롱하며 끊임없이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지천에 깔린 게 사랑이야기다. 영화 `지독한 사랑'(이명세감독-씨네2000제작)도 그렇고그런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 TV드라마나 주간지의 소설에서나 읽어봤음직한 관계가 이 영화의 토대다.
유부남은 시인인 대학교수이고, 그의 상대는 여기자라는 좀 고상한 직업인으로의 설정은 다분히 의도적. 사랑에 눈이 뒤집혔는데 고상이며 우아가 어디있느냐는 반어적인 장치다.
품위있는 자리에서 만났지만 식탁밑의 발끝이 부딪치는 순간부터 두 남녀는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다.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거짓말로부터 나중에는 방학기간동안 글좀 써야겠다는 핑계로 한번 만나고, 두번 섹스하고, 아예 동거까지 이르고야 마는 관계.
어디가 끝인지. 밥을 먹다말고 밥상을 밀어놓는 건 예사다. 아무데서고 서로의 몸을 쓰다듬고 끌어안고 미친 듯이 탐한다.
완전한 사랑은 `무'. 그러나 고행으로서의 사랑은 `무'에 이르지 못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갈등을 빚는다.
`무'와 `욕심'의 사이에서 이들은 수없이 이성과 본능을 오간다. 광적인 섹스에 이어지는 거친 싸움. 치고 받고 던지고 멍든다.
한참을 싸우고 눈물까지 쏙 빼고난 뒤, 느닷없이 "국 좀 있어요?"는 또 뭔가.
배우다운 배우를 만나기 어려운 요즘 과 김갑수는 그야말로 `배우'를 실감케 한다. 특히 전라노출을 마다하지 않은 의 열정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세트미학의 귀재 이명세 감독은 특유의 동화적 상상력을 현실의 시점에다 밀착시켜 이런 그림들을 소름돋도록 강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놓았다.
그동안 `개그맨'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등의 영화를 통해 "동화적 상상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몽환가"라는 평가를 받아온 이 감독은 적어도 몽환가라는 닉네임만큼은 떨어내게 됐다. 경험에서 우러난 듯한 일상의 리얼리티가 `끔찍'할 정도다. 이별을 앞두고 떠난 라스트의 겨울여행. 느릿한 재즈풍의 `봄날은 간다'를 배경으로 4분여동안 펼쳐지는 흑백톤의 섹스를 통해 이 감독은 사랑의 허무를 극명하게 드러낸 뒤, 이어서 평화롭게 사내의 등에 업혀있던 여자의 입을 통해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가요".
지독한 사랑은 이렇게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