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승 초단 ●김영삼 2단
기사입력 1996년 05월 31일 17시 05분
본선 토너먼트 제1국 제10보(88-109)=5분간 숙고한 뒤 흑 89로 맞끊어가는 청년의 뇌리를 스치는 사념하나.
심장의 고동이 빨라진다. "여기만 무사히 수습하면 빨리 끝낼 수도 있다…." 이하 흑 93까지 피할 수 없는 패인데.
피끓는 젊음을 탓해야 할까.
이패는 흑이 두번을 이겨내야 수습이 가능한 악조건의 형태인 데다 잡아둔 우상쪽 백이 '팻감공장'으로 버티고 있어 시도
자체가 빌미를 제공하는 꼴. 흑으로서는 이로울 게 없다.
백 96. 드디어 우상쪽 '팻감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한다.
흑 99는 쓰고 싶지 않은 팻감.
그렇지 않아도 두터운 백진에 살을 붙여주는 이적행위에 가깝다. 상대적으로 잭 102를 때려내는 순간 108의 곳을 끊는 수가 생기는 기분 좋은 팻감.
흑 103은 내친걸음. 이제와서 물러설 수도 없고 다른 변화의 여지도 없으니 그야말로 '울며 겨자먹기'인데 좌상일대로부터 중앙까지 이어진 백의 형태는 아예
금성철벽이다.
속절 없이 이어지는 패의 공방은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단숨에 흑 107까지 내닫는다. 비켜주지 않는 상대를 향해 이끌리듯 달려가는 우울한
클랙슨 소리. 그 끝에 파멸의 어두운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형세를 발전시킨 소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철하다. 10분간을 숙고한 뒤 백 108, '형님, 이제 어쩔거요?' 하고 묻는다. 아프다. 지금이라도 흑 '가'에 찔러두면
상변은 무사하지만 계속되는 패의 공방은 견뎌낼 재간이 없다. 흑의 팻감이라고는 '나'의 곳 하나뿐인데 백은 우상쪽외에도 백 '다'로 시작되는 좌상귀의 '팻감공장'이
또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나? 우상쪽에 초대형 주택단지를 건설하면서 '이겼다'고 환호하던 순간이 꿈만 같다.
미친 바람 같은 회한의 고통이 신경세포를 타고 머릿속을 어지럽게 횡행한다. 자신을 향한 노여움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이성의 통제를 무너뜨리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