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현 8단 ●최명훈 4단 = 2차예선 결승 제11국
기사입력 1996년 05월 07일 14시 25분
**백 152로 살았지만 역전희망 없어 제 9 보 (118~153)=혼신을 다해 버텨온 정 8단. 하나씩 둘씩 패감을 빙자한 흑의 병력이 반상에 투입될 때마다 피가 마르는데 백 118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119로 패를 때려내는 최 4단은 여유만만이다. 괴롭지만 목숨이 걸린만큼 외면할 수도 없는 처지. 백은 오직 `생존'만을 위해서, 두고 싶지 않았던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120, 122. 이곳은 상대에게 봉쇄당하는 조건으로 후수 한집을 만들어낼 수 있는자리.
이미 검토실의 관전객들은 이 승부에 흥미를 잃었다. 몇몇은 지난 한주의 기보를 꺼내 복기를 하기도 하고 또 몇몇은 바둑판 주위로 둥그렇게 앉아 한담을 나눈다. 화제의 대상은 유창혁 7단이다.
"아니, 올해는 한밑천 만들어 장가라도 가려구 그러나. 어째 지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글쎄 말야. 청도에서도 조치훈, 조대원을 꺾고 결승에 올랐다며? 또, 무슨 광고에도 나온다던데…."
응씨배 4강에 아시아 TV선수권전 결승진출. 확실히 요즘의 유창혁은 지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들을 만하다.
그러고 보니 유창혁도 어느새 결혼적령의 황금기를 슬금슬금 넘어서고 있다. 타고난 동안(童顔)이라 잘 아는 사람조차도 깜박깜박 제풀에 속아 20대 초반의 신세대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66년생, 서른살이다. 올가을쯤에는 홍익동에 국수한그릇씩 돌리려는지.
바둑은 이제 종착역이다. 패는 여전히 백의 명줄 끝에서 이어지고 있지만 피비린내 나는 살의(殺意)는 사라지고 없다. 패는 이미 논외라는 얘기.
흑이 `가'나 `나'의 곳에 말뚝을 치면 중앙 흑의 영토는 50여집이 된다. 좌변도 10집은 족히 될 터이고 우하쪽 10집과 우변 10집을 합치면 80집을 상회한다.
반면, 백이 내세울 수 있는 큰집이라고는 좌상귀 20여집 뿐이다. 나머지 좌하귀, 우상귀 그리고 목이 걸린 대마의 부실한 호주머니를 털어 합쳐도 20여집, 덤까지 보태줘도 60집에 못미친다. 지리한 패의 공방 끝에 152까지 삶은 확인되었지만 역전의 희망은 없다. 뒤의 수순은 총보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