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운명(運命)의 장(章) (43)
기사입력 1996년 05월 06일 14시 17분
심양의 왕자궁.
동방왕가의 무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있는 왕자궁은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왔다."
안도의 목소리가 멀리 왕자궁을 바라보며 홀연히 들려왔다.
목엽이다.
참혹하기 이를데 없는 몰골.
지난 열흘간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심양으로 달려온 목엽은 몹시 지쳐 있었고 이 순간 정신도 혼미해 보인다.
그를 태우고 왔던 아비라왕녀의 말 역시 형편없었다.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듯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보였다.
"고맙다."
언제나 무심하던 목엽도 말잔등을 어루만지며 감사한다.
암흑으로부터 사악한 섬광이 작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믿을 수 없게 빠른 광채가 뇌전(雷電) 처럼 목엽에게 곤두박질쳤다.
"웃."
목엽은 경악성을 발하며 민첩하게 신형을 날린다.
그의 몸놀림은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말에서 비스듬히 눕는가 싶었는데 벌써 이 장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파앗 하는 기음이 터짐과 동시에 피분수가 뿜어져 올랐다.
자지러지는 준마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때리고 섬뜩한 피비린내가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진동했다.
목엽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고 만다.
아비라왕녀의 준마가 그대로 동강난 채 네 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피의 열기속에 전혀 대조적인 은발의 중년인.
쌍검을 비스듬히 교차한 채 그는 거기 그렇게 있었다.
"놀랍군. 나의 쌍십자검(雙十字劍)을 피해내다니…."
타르무왕의 호위총령인 백발쌍검자 하군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목엽은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암습이라니… 여전히 비겁하군."
하군휘는 냉소를 머금었다.
"비겁한건 귀하요. 이번에는 달아나지 마시오."
"내가 피하지 않는다는 건 반드시 새로운 죽음을 예고하는 것일세."
감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음성이 목엽에게서 흘러 나왔다. 태도는 확연했고 의연했다. 완전히 지쳐있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도(氣道)도 풍겼다.
하군휘는 동요한다.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지쳐 있었다. 그런데 신법은 얼마나 놀라웠던가? 대황제일검 이소야의 검법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 것일까?'
상념은 빠르게 스쳤고 행동은 그 생각과는 달랐다.
"쌍검풍운류(雙劍風雲流)!"
하군휘는 수중의 쌍검을 난무하며 질풍마냥 쇄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