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사회 -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
기사입력 1996년 05월 01일 15시 57분
**옴니버스형식 4가지 에피소드로 엮어 **맹복적 욕망-허상쫓는 현대인의 자화상 그려 당신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만원지하철 속에서 짐짝처럼 부대끼며 출근하고, 상사의 잔소리를 언제쯤이나려 듣지 않게 될까를 상상하며 한숨짓지는 않는지. 왜 모든 일이 꼬이기만 할까 탄식하다가는 어둠이 깔린 도시의 뒷골목 호프집에서 생맥주 한잔으로 하루의 시름을 걷어내는 일상. 어쩌다가 애인과 격렬한 섹스라도 한차례 치르고 나면 마치 지친 삶의 한쪽을 위로받은 양
착각하며 살지는 않는지. 신인감독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동아수출공사제작)은 바로 이러한 일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사실적으로, 더러는 블랙코미디처럼 복합적으로 담아낸 영화다. 3류소설가로 취급받으면서도 자신의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글쓰기에 집착하고 유부녀인 보경()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효섭(김의성). 바람피우는 아내를 둔 결벽증을 지닌 소심한 샐러리맨 동우().
적당한 허영심과 허상으로 소설가 효섭과의 사랑을 만들어가는데 모든 것을 바치는 극장매표원 민재(조은숙).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기를 되찾을 수 있다며 효섭을 믿고 일상에서의 탈출을 감행하는 유부녀 보경. `돼지가…'은 이들의 유별나지 않은 일상을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일정한 줄거리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또는 극적인 사건이나 숨가쁜 드라마는 이 영화에 없다. 그저 이들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관계들에 카메라의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다. 소설출간을 거절한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되돌려받은 효섭이 자신의 열렬한 팬인 민재를 불러내 돈을 빌리고, 이 돈으로 보경과 섹스를 나누고, 또 같은 시간 민재는 효섭의 선물을 사면서 기쁨에 찬 표정을 짓는 식으로 모두 4개의
에피소드가 서로 물리고 물려 펼쳐진다. 주요 인물 4명이 각각 하나의 에피소드마다 주연이 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면서도 나머지 에피소드에서는 저마다 조연으로 역할을 바꾸어 등장,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겉으로는 옴니버스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결국 이 에피소드들은 각 인물들의 닫힌 자아와 갇힌 시간을 부각시키면서 서로 연관된 하나의 드라마로 완성된다. "4명의 인물을 통해 인생의 맹목적인 욕망과 허상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게 홍 감독의 연출변. 영화속에서 간혹 나타나는 불륜의 섹스나 상처, 갈등 등에는 별반 무게중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잠시도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도록 하는 데서 `형식파괴'의 성공을 볼 수 있다. 김의성 조은숙 등 배우들의 호연도 영화의 성공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