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운명(運命)의 장(章)(36)
기사입력 1996년 04월 28일 17시 21분
황보백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찰라의 순간에 억겁의 상념이 뇌리를 스쳐갔다.
강호에 대한 은원(恩怨)과 자신의 운명(運命).
그리고 무뚝뚝하고 냉담한 한 사내의 모습.
이상한 슬픔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마지막 순간의 삶은 언제나 그러하듯 후회로 남는 것일까? 눈물이 솟는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 줄기 예리한 바람소리와 함께 황보백령의 몸이 갑자기 퉁겨졌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몸은 가벼운 깃털이 된 듯 허공중에 두둥실 떠오르게 된 것이다. 괴이한 일이 아닌가?
황당한 것은 황보백령에게 공격을 가하던 묵양대인이다.
"누가 훼방을 놓는 것이냐?"
분노로 인하여 떨리는 노성은 사나운 포효와도 같았다.
이때 이 장밖에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그 곳에서 바로 그 자세로 굳어진 사람과도 같았다. 그의 손에는 푸른 빛깔이 감도는 한 자루의 장검.
벽천무상검이라 불리는 이 시대의 젊은 영웅 남궁도였다.
남궁도는 중무련으로부터 재차 명령을 받고 고수들과 함께 출동하여 황보백령 일행을 추적해 오던 중이었다.
황보백령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바로 청년기협 남궁도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황보백령은 매우 놀라운 표정으로 경직돼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어서 일단의 무리들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중압감이 감도는 인물들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남궁도와 같이 온 중무련의 인물들이었다.
"어떤 놈들이길래 남의 먹이를 가로채느냐?"
묵양대인이 맹수처럼 남궁도와 중무련의 무리들을 살기어린 눈으로 둘러보며 소리쳤다.
남궁도는 냉랭한 콧방귀를 날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의 먹이란 말이오?"
이 사내는 언제나 여유가 있어 보인다. 늠름하고 믿음직스럽다.
지금은 전혀 아름다운 몰골이 아닌 황보백령.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남궁도의 고고한 자세를 올려다 본다. 눈빛이 교차되는 순간 남궁도는 허전하게 가슴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황보백령은 감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궁도는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인다.
"우린 또 만났소."
"그렇군요."
"중무련의 경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낭자는 위험했소."
"그렇군요."
그녀는 형식적인 대답을 했고 그래서 이 의혈남아(義血男兒)는 기분이 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