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운명(運命)의 장(章) (14)
기사입력 1996년 04월 04일 17시 00분
묵기량. 마치 여인의 섬세한 교구를 닮은 듯한 사내. 그가 지금 밤하늘의 외로운 별 처럼 고독의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다. 젊은 나이로 당대 최고의 청부자객단 우두머리가 된 이 사내의 가슴은 언제나 비정한 살기로 번뜩였다. 그러나 이 순간의 표정은 평소의 그와는 사뭇 다르다.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느 누가 감히 혈마사(血魔社)의 사주를 외롭게 하는가, 누가 그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오도록 하는가. 묵기량은 본래 고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청부를 받고 집행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황보백령을 만난 후 사정은 달라졌다. 목엽의 신검을 찾아 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열 흘 전이 였고 그 명령을 회수한 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 사흘 전이었다. 묵기량이 다시 황보백령의 곁으로 돌아 왔을때 목엽은 없었다. 그리고 황보백령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도 사라져 있었다. 떠나간 목엽이 황보백령의 미소를 거둬간 것일까. 묵기량은 이상한 고독감을 느끼고 그것은 미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목엽...그 작자를 죽이고 싶다.' 혈마사주 묵기량의 심정이었다. "묵대협."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하면서도 정기가 서린 음성이었다. 산기슭의 나직한 능선 위에 솟아있는 듯한 한 대의 호화로운 팔두마차. 음성은 바로 그 곳에서부터 흘러 나온 것이다. 묵기량의 어깨가 슬쩍 움직이는 순간에 이미 그의 신형은 마차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차안에서 세 여인이 나란히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황보백령과 궁수월 그리고 무산파파였다. "부르셨습니까?" 묵기량이 가볍게 포권을 취하자 총관 궁수월이 물었다. "아직도...?" 혈마사주 묵기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세여인은 지평선 멀리 불빛이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장원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낙양표국. 황보백령 일행은 마침내 황금사원의 중원지부의 낙양표국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표국으로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것일까? 그녀의 표정은 약간 어두웠고 어딘지 초조한 빛이 어려 있었다. 궁월수와 무산파파 역시 어두운 표정이었다. 사위는 밤의 적막에 잠겨 조용하고 가까운 숲속에서 희미한 야조의 울음소리만이 들려 왔다. 이때 하나의 인영이 바람처럼 몸을 날려와 장내에 우뚝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