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규 7단 ●이창호 7단
기사입력 1996년 04월 03일 16시 43분
제9보(85~115)=백이 전보에서 좌변정리를 서두른 까닭은 좌하귀에서 밀려 나온 백 일단의 체면(?) 때문이다. 뭔가 여기서 소득을 올려야 좌하귀를 송두리채 넘겨준 명분이 서지 않겠는가. 그러나 좌변은 이미 추수가 끝난 들판과도 같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삭줍기'에 불과할 뿐. 환상처럼 백의 머릿속을 횡행하던 승리의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백은 이때라도 냉정을 되찾아 `가'로 뛰어야 했다. 그것으로 상황이 호전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승부는 좀더 길게 이어졌을 것이다. 흑85의 어깨짚기에 우선 백의 진영이 힘없이 무너져간다. 애초 백이 이곳을 부풀리기 위해 좌하귀를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면 백의 좌변행이 방향착오였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가'의 곳에 백의 원군이 있었더라면 흑 85의 침입은 어려웠을 것이다. 뒤늦게 백 86으로 밀어올려 이하 94까지 공격자세를 취하지만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창호는 쉽게 칼을 뽑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상대의 허를 발견하고 도광(刀光)을 번득이면 그 응징의 손속은 단호하기 이를데 없다.
흑 95, 97이 종국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결정타. 백 1로 막아서면 흑 2로 끼워, 다음 백의 응수가 없다.
할일없이 방향을 바꿔 백 100 이하 114까지 좌상쪽을 향해 몇발의 포탄을 날렸지만 백의 시선은 여전히 우변에 멎어 있다. 터엉 빈 `가'의 곳. 이제와서 보니 더욱 마음이 쓰리다. 이곳이라도 선점해두었더라면》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던가. 흑 115에 이르러 7단은 돌을 거두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