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운명(運命)의 장(章) (8)
기사입력 1996년 03월 29일 16시 07분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오는게 아닌가!
"나는 곧 죽을 몸이니 너는 그냥 네 갈 길로 가도록 해라."
아귀는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보니 아직 안 죽었군! 그렇다면 왜 그냥 누워서 죽으려 한단 말이요? 사람이 한 번 죽으면 술도 못 마시고
여자와 잘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요?"
아귀는 제풀에 흥분해서 목엽의 상체를 억지로 부축해 일으켰다.
"어서 일어나 보시오! 당신은 천하제일의 고수인데 나뭇가지에 좀 찔렸다고
여자와 잠자는 재미까지 포기하고 저 세상으로 가려 한단 말이오?"
목엽은 겨우 눈을 떴으나 나직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나를 그냥 버려두고 가거라. 나는 지금 매우 마음이 평온해서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
"당신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 당신은 꽤 미남이라서 반반한 미녀들도 꽤 따를 듯한데 왜 그런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가려는 거요?"
"얘야, 제발 나를 더 귀찮게 하지말아 다오."
"당신이 이러는 건 부친이 죽었다는 말은 들었기 때문이요? 이제야 내가 말하지만 당신 부친은 죽지 않았소!
나는 당신 부친을 얼마 전에 분명히 만났을 뿐만 아니라 내가 보관하고 있던 신검까지도 넘겨 주었소!"
순간 목엽의 두 눈에는 한 줄기 정채가 스쳐갔다.
"그게 정말이냐?"
"내가 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헛소리를 하겠소? 사원이 당신 부친을 벤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죽은 건 아니오.
절대 귀신이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소. 그분은 약간 주책맞게 젊은 여자를 데리고 다니오. 지금 중원에 들어와 있소."
"아버님이…."
목엽은 흠칫 놀라는 빛을 보인다. 아귀는 품 속에서 조그마한 약병을 꺼내더니 목엽의 옷자락을 헤치고
가슴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역시 당신도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요. 나에게 마침 어느 돌팔이에게 슬쩍한 지혈금창약이 있으니
응급치료를 해 주겠소."
아귀는 상처에 약을 바르고 옷자락을 찢어서 잘 동여매주었다.
목엽은 이제 거부하지 않고 아귀가 하는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부친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말에 위안을 받은 것일까.
상처를 대강 치료한 아귀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 모닥불을 피웠다.
그 중에는 사원과 목엽이 각기 사용하던 나무도 있었다.
"당신은 피를 많이 흘려서 체온이 떨어졌을테니 이불에 몸을 좀 녹이도록 하시오.
잠시 쉬어서 기력이 회복되면 내 말을 함께 타고 인가에 들러서 요기를 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당신은 더 이상
죽을 염려가 없소."
무언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목엽은 문득 아귀를 돌아보았다.
"고맙구나. 그런데 네가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잉유가 무엇이냐?"
아귀는 점잖게 대꾸했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지 않소? 나는 당신이 죽음에 대해 아주 초연한 것을 보고
약간의 감동을 받았소. 나 역시 인생의 온갖 고뇌와 번민을 겪어온 사람으로서 당신과 일맥이 통하는 느낌이 들었던거요."
목엽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