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운명(運命)의 장(章)(4)
기사입력 1996년 03월 25일 16시 19분
아귀는 평소와 달리 수다 한 마디 떨지 않고 긴장하여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사원이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정중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나는 먼저 귀하에게 한 가지 밝힐게 있소. 그것은 내가 귀하의 부친을 죽였다는 사실이오."
목엽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으나 여전히 대구도 하지 않았다.
이미 부친 이효봉이 사원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격동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는건 실로 의아한 일이었다.
어찌 부모의 원수를 대함에 있어 이토록 평온할 수 있는가?
과연 그의 수양이 삶을 초월했단 말인가? 아니면 포기인가?
어쨌든 그는 한때 부친의 죽음에 있어서 심하게 격동하고 상심한 적이 있었던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사원의 말을 듣고 흠칫 놀란 사람은 아귀였다.
얼마 전에 아귀는 이효봉이 살아 있는 걸 똑똑히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신검까지 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원이 이효봉을 죽였다고 하니 금란에 의해 그가 구원받은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귀로서는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정이야 어떻든 지금 중요한 것 두 사람의 대결이 아닌가.
사원은 이어서 직선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나는 귀하에게 사죄할 생각은 업소. 왜냐하면 귀하가 검을 뽑아 나를 벤다면 그것은 명쾌한 복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오.
이 말은 잡담은 제하고 대결을 하자는 의미였다.
목엽은 대꾸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러하듯 표정 역시 무심했다.
마치 복수를 하러 찾아온 대상자가 사원인 듯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동방장주의 솜씨는 비범했소. 난 본래 그 분이 귀하라고 믿었소. 왜냐하면 신검을 지니고 있었기 대문이오."
한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던 목엽은 이윽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는 곧 한쪽 잡목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들었다.
마침 목엽은 낡은 폐검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목엽은 나뭇가지를 들고 사원 앞으로 와서 우뚝 멈추어 섰다.
"시작합시다."
사원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목엽은 본래 천하의 가보인 신검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 신검이 없어서 나뭇가지를 들고 대결을 하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아귀는 내심 안타가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신검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은 그야말로 평생 보기 힘든 천지대결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사원의 섬전 같은 눈빛이 바로 아귀에게 쏟아졌다.
"이제 드디어 제가 수집한 그 칼을 유용하게 사용할 시기가 된것 같구나. 어서 그에게 신검을 쥐어줘라."
그 순간 아귀는 갑자기 사타구니가 축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