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봄날 눈앞엔 헛것이 '아른'
기사입력 1996년 03월 25일 14시 15분
봄이 시작되는 이 맘때 쯤이면 서울만 가면 누구나 팔자를 고칠 줄 알고 서울로 올라 오는 금순이 옥분이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지금은 주판이나 전당포, 베갯속장수처럼 보기 힘들어 졌다.
이른바 `봄맞이 무작정 상경녀'들였다.
봄이되면 실제로는 형체가 없는데도 아른아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눈에 헛 것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 시절 시골녀는 대개 `내가 시골서 파나 다듬고 논으로 밥(새참)이나 나르며 썩어야 하냐'며 상경을 감행했는데 서울에 와봤자 식당 주방에서 파를 다듬고 밥을 나르지(배달), 상당수가 `경아'나 `영자'로 개명을 한 뒤 특정 직업에 종사를 하기가 일쑤였다.
봄은 사람의 긴장을 풀어 주고 정신을 몽롱하게 해서 때로는 환영을 보이게 하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고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아니면 이런 비극을 당할 수도 있다.
뒷산에서 뻐꾸기 우는 봄날, 젊은부부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그런데 나그네가 지나가다 보니까 남편에 비해서 아내의 자태가 너무 곱다. 미래의 말로 섹시하다는 거였다.
응큼한 생각이 동한 나그네, 순진하지만 띨딜한 남편에게 냅다 소리를 지른다.
"여보쇼! 벌건 대낮에 들판에서 이게 뭡니까? 하늘이 보고 땅이 보고 내가 보는 데 부끄럽지도 않소? 밤에 집에 가서 할 일이지."
남편이 가만있겠는가?
"당신 미쳤소? 난 아내랑 그저 김만 맸을 뿐이오. 우리가 여기서 옷을 벗고 그 일을 했다니…"나그네는 대번에 사과를 한다.
"아,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봄에 헛것이 보이는 수가 있다더니 제가 정신이 혼미해진 모양이구랴! 그러나 나도 미친사람 소리를 듣고 억울하니 당신이 약간 떨어진 여기서 그 쪽을 한번 바라 보시오. 내가 본 것과 같은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요? 그 건 어렵지 않지요."
나그네는 남편의 동의를 얻어 그의 아내 곁으로 가서 여자를 넘어 뜨린뒤 재빨리 옷을 벗어 부치고 그일을 했다. 그런 다음 남편 곁으로 와서 물었다.
"당신이 보기에 어땠소? 내가 말한 그대로가 아니던가요?"
"참말이오. 봄엔 눈에 헛것이 보이는 수가 많다더니…아깐 화를 내서 미안하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