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혁 7단 ●황원준 8단 2차예선 결승
기사입력 1996년 03월 20일 16시 58분
제5보 (48~74)=백이 하변에서 터를 잡고 날렵하게 좌변 48로 날아 안정된 자세를 취하자 흑은 목표를 잃어버렸다.
풍요의 문이 열리려는 순간 갑자기 찾아든 공황. 우하일대 흑의 외세가 둔중한 형태로 우그러들면서 상대적으로 우하귀 백의 실리는 더욱 빛난다.
흑 53은 뒤늦은 공격. 두텁게 백 54로 꼬부려두고 백 56으로 역습에 나선다. 백
(전보 백 24) 한점쯤은 가볍게 넘겨주고 이쪽에서 대가를 찾겠다는 유연한 착상이다.
흑 59로 흑 1처럼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마추어 하급자들의 발상. 백 2때 흑 3, 5로 2선을 기어 달아날 수는 있지만 백 8이면 바둑은 `끝'이다. 흑의 요석 두점을 말아 넣으며 거대한 전함으로 돌변한 백 일단은 향후 중앙 해전에서 엄청난 화력을 발휘하게 된다. A의 함포사격도 선수다.
백 62, 64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백 66, 68까지 당하고보니 애초 흑의 기름진 텃밭이었던 좌하귀는 풀 한포기 없는 자갈밭이 돼버렸다.
불끈 솟구치는 노여움을 실어 흑 69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별 위력은 없다. 허리를 숙여 백 70으로 잽 한방을 가볍게 날려두고 백 72, 이건 비상구다.
흑 73. 이렇게 울타리를 쳐두지 않으면 중앙은 공유지가 되기 십상이다. 백 74로 기분좋게 밀어갈 때 검토실에서는 `흑이 집부족에 시달릴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는다.
"뭐야, 이거. 좌하귀도 다 뜯기구. 이러다가 벌거벗고 칼 차는 거 아냐?"
`벌거벗고 칼 찬다'는 말은, 실리를 빼앗기고 공허한 외세만 갖춘 형태를 풍자하는 검토실의 은어. 속된 감이 없진 않지만 말 한마디에도 프로다운 기발함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