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후보 꺾고도 불펜에이스 아끼다 폭망, 2009년 韓 상대로도 그랬다

2023-03-19 22:43:16

미국 트레이 터너가 8회 무사 만루서 베네수엘라 실비노 브라초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날리고 있다. UPI연합뉴스

[스포츠조선 노재형 기자]단기전 승부의 절반은 감독의 손에 달렸다는데, 베네수엘라에겐 두고 두고 아쉬운 투수교체로 남을 것 같다.



베네수엘라는 19일(한국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 8강전에서 미국과 역전과 재역전을 주고받은 끝에 7대9로 무릎을 꿇었다.

승부처는 8회초 미국의 공격. 베네수엘라는 앞서 7회말 루이스 아라에즈의 솔로홈런으로 7-5로 점수차를 벌리며 승부에 쐐기를 박는 듯했다.

그런데 7회초 2사 1,3루서 등판해 카일 터커를 삼진으로 잡고 불을 끈 호세 키하다가 8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선두 팀 앤더슨에 볼넷을 허용,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타 피트 알론소의 빗맞은 타구가 우익수 앞 안타가 되더니 다음 타자 JT 리얼무토가 키하다의 공에 맞아 베네수엘라는 순식간에 무사 만루에 몰렸다.

여기에서 베네수엘라의 선택은 우완 실비노 브라초였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브라초는 작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3경기에 나가 평균자책점 6.23을 올렸고, 구속도 WBC 참가 투수 치고는 느린 93마일 안팎. 베네수엘라의 100마일 강속구 좌완 호세 알바라도는 그 순간에도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오마 로페즈 감독이 곧바로 알바라도에게 연결하지 않고 브라초를 먼저 내보낸 것은 9회를 염두에 둔 선택인 듯했다.

그러나 그게 승부를 갈랐다. 브라초는 첫 타자 트레이 터너에게 투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아 유리한 볼카운트를 만들었다. 그러나 3구째 85.5마일 체인지업이 한복판으로 밋밋하게 떨어지는 실투가 되면서 터너의 방망이 중심에 정확히 걸렸다. 좌월 그랜드슬램이 터졌고 스코어는 단번에 9-7 미국의 리드로 바뀌었다.

미국 선수들이 홈플레이트로 몰려나와 터너를 둘러싸자 미국 팬들이 절대 다수인 론디포파크는 열광의 도가니로 뜨거워졌다. 베네수엘라는 승부가 기운 9회초 그제야 알바라도를 올렸다.

경기 후 로페즈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고 있을 때, 야구라는 경기에서 어떤 작은 일(any little thing) 때문에 패한다면 좌절감을 느낀다. 불행하게도 그게 야구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나이답게 고개를 들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고 괴로워했다. '작은 일'이 자신의 투수 교체인지, 브라초의 체인지업 실투인지 알 수 없으나, 자책의 의미도 포함됐다고 보면 된다.

베네수엘라는 '죽음의 조'로 지목된 D조에서 최강 도미니카공화국과 푸에르토리코를 잇달아 격파하고 조 1위로 올라왔다. 8강 상대가 하필 대진표상 C조 2위 미국이 됐다. 경기 후반까지 분위기는 베네수엘라가 쥐고 있었다. 모든 흐름을 뒤바꾼 건 8회 로페즈 감독의 석연치 않은 투수 교체, 브라초의 한복판 체인지업 두 가지였다.

USA투데이는 '오마 로페즈 감독은 우완 브라초를 올림으로써 베네수엘라에서 앞으로 수년 동안 의심받게 될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고 논평했다. 지면 떨어지는 토너먼트에서 불펜 에이스를 아낀 건 실수였다는 뜻이다. 로페즈 감독은 휴스턴 애스트로스 1루 코치로 3년째 재직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2009년 WBC 준결승서도 에이스를 아끼다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베네수엘라 루이스 소호 감독은 에이스 펠릭스 에르난데스를 놔두고 카를로스 실바를 한국전 선발로 내보냈다가 2대10으로 패했다. 소호 감독은 "준결승 만큼이나 결승도 중요하다"며 여유를 부리다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아야 했다. 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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