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때 웃는게 일류" 데플림픽 '일류'청각장애인 국대들에게 배운것[10일 동행기]

2022-05-12 09:18:09

상파울루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친후 바닥에 주저앉아 기다리는 데플림픽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들. '힘들어도 웃는 것이 일류'라고 했던 이진영은 8일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오른쪽 사진) 사진=스포츠조선 전영지 기자,한국농아인스포츠연맹

'데플림픽(deaflympics)'은 4년에 한번 열리는 전세계 청각장애인들의 올림픽입니다. 장애인체육을 담당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데플림픽 취재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직도 데플림픽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그들만의 대회입니다.



1924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한 데플림픽은 1948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패럴림픽보다 엄연히 '형님'입니다. 농아인들의 자부심과 열정의 온도는 뜨겁지만, 예산도 행정도 관심도 지원도 비장애인 올림픽이나 패럴림픽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5월 1~15일 지구 반대편 브라질 남쪽 이름도 낯선 카시아스두술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제24회 데플림픽, 출국 전부터 마음을 '단디' 먹었습니다. 40시간의 비행, 첫날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29일 오후 5시30분쯤 상파울루공항에 도착한 선수단은 짐이 늦게 도착해 포르투 알레그리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을 놓쳤습니다. 51명의 선수단 중 절반은 밤 11시15분까지 뿔뿔히 간신히 비행기에 올라탔지만 태권도대표팀 등 26명은 한밤 낯선 이국의 공항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명색이 국가대표인데 공항 노숙이라니.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이 험난한 상황에 직면한 농아인 국가대표 선수들의 태도였습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고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삼삼오오 모여앉은 선수들은 몸을 풀고, 가위바위보를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더군요. 뿔이 잔뜩 난 비장애인 감독이 "낼모레 경기를 뛸 선수들이 공항 노숙이라니. 올림픽, 패럴림픽이면 난리날 사건"이라며 언성을 높이며 항의하자, 태권도 국대 이진영 선수가 웃으며 만류합니다. 어눌하지만 따뜻한 말투로 오히려 화난 감독님을 위로합니다. "감독님, 힘들 때 웃는 게 일류예요." 무려 8시간의 기다림, 새벽 1시30분쯤 간신히 공항 인근 호텔에 투숙해, 이튿날 오후에야 카시아스두술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한 관계자는 "이들에게 기다림은 일상이다. 2017년 삼순 대회 때도 이런 식이었다. 말 못하는 농아인들은 웬만한 힘든 상황은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고 했습니다.

카시아스두술 경기 현장도 열악하긴 마찬가지. 사격장에선 '곧 온다'던 전자표적 장치가 대회 당일까지도 오지 않았고, 일정이 이틀이나 미뤄졌지만 결국 10년 전 종이표적지가 등장했습니다. 종이표적지 사용방법과 경기 규칙을 새로 설명하는 과정도 복잡했습니다. 심판위원장의 포르투갈어 설명을 브라질인 수어통역사가 국제수어로 통역하면 이를 선수단 통역사가 한국어 수어로 바꿔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방식. 현란한 수어 릴레이 속에 수어를 모르는 비장애인 코치는 포르투갈어 현지 통역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입니다. 장성원 사격대표팀 감독은 "모두가 똑같이 힘든 상황이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며 선수들을 독려했습니다. 첫 경기, '1998년생' 김우림이 공기소총 10m에서 은메달을 따더니 이튿날 '청각장애 누나' 김고운도 동메달을 땄습니다. 사격 공기권총 10m 김기현, 민지윤이 은메달, 김태영, 전지원은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장성원 감독의 목표는 "전원 메달"입니다.

11명이 함께 뛰는 축구는 소통이 가장 중요한 종목입니다. 감독들이 가장 많이 하는 주문이 "서로 말을 많이 하라"는 건데,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이들은 오로지 눈빛으로 소통합니다. 김영욱 축구대표팀 감독은 매경기 목이 쉽니다. 선수들은 감독의 말을 온몸으로 또는 최대한 소리 질러 전달하려 애씁니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필사적인 외침이 귓가에 오래도록 맴돕니다. '최강' 우크라이나에 1대2로, 아르헨티나에 0대1로 아깝게 진 선수들은 3차전에서 이집트에 무려 0대9로 대패했습니다. 데플림픽 축구장엔 제대로 된 라커룸도, 경기시간을 표시하는 전광판도, 선수 교체판도 없습니다. 듬성듬성 논두렁 잔디, 진흙탕 축구장에서 거침없이 몸을 던지고, '10번 주장' 정준영은 발가락이 골절된 채 진통제를 맞아가며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인조잔디 훈련만 해본 선수들은 장맛비로 발이 푹푹 빠지는 떡잔디 축구장에서 참담한 대패를 맛봤습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대회 자체가 많지 않은 우리 선수들에게 지는 것도 배움이다. 이 패배를 기억하길 바란다. 3년 후 도쿄데플림픽을 어떻게 준비할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 유도는 이번 대회 금메달 2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 역대 최고 성적을 올렸습니다. 좋은 성적 뒤, 선수단의 입과 귀가 돼준 수어통역사들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정은경 수어통역사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고 돌아봤습니다. 여자유도에서 금메달 2개(최선희, 홍은미)가 나오던 날, 정 통역사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이날 아침, 김주니 선수가 팔꿈치 골절 부상으로 현지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이주영 대한장애인체육회 물리치료사와 함께 종일 병원에서 선수 곁을 지키다 금메달 소식을 듣고 환호했습니다. 그녀는 가장 아쉬운 일로 "유도장에서 애국가를 듣지 못한 것", 가장 보람 있는 일로 "부상한 선수의 보호자가 된 일"을 꼽습니다. 수어통역사는 농아인 선수들과 세상을 잇는 통로이자 말벗이자, 보호자입니다. "3년 후 도쿄에도 가야할 것 같다. 그땐 현장에서 애국가를 듣고, 금메달 수어통역을 꼭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7일 귀국편 비행기 안에서 '태권도 품새' 최민호와 전시원의 첫 메달 소식을 들었습니다. '힘들 때 화 안 내는 게 일류'라던 이진영 선수는 8일 여자 67㎏ 이하급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꽃미남 기수' 이학성 선수도 80㎏ 이하급에서 3연패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80㎏ 이상급의 하관용 선수도 금메달을 땄습니다.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는 지도자 선임을 둘러싼 집안싸움으로 이번 대회 선수단을 파견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선수들은 '금4, 은2, 동2' 역대 최고 성적으로 '종주국' 대한민국 태권도의 자존심을 오롯히 지켜냈습니다.

'힘들 때 화 안내는 게 일류'라는 금메달 선수의 말을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이 선수들을 매트에서, 공항에서 헤매게 한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선수들은 일류인데 어른들이 이류입니다. 밥그릇 싸움, 부족한 행정은 부끄러워 마땅합니다. 이제 이 '일류'들의 '소리없는 아우성' '끝없는 기다림'에 우리가 화답해야 할 때 아닐까요.

카시아스두술 데플림픽은 오는 15일까지 계속됩니다. '소리없이 강하게' 오늘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는 청각장애 태극전사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냅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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