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KBO리그의 주축이 되어 뛰는 '90년생' 선수들. 그들의 시작은 2008년 에드먼턴이었다. 그해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의 역사적인 우승 멤버가 지금 활발하게 활약 중인 선수들이다.
그 대회에는 4명의 유격수가 있었다. '고교 유격수 4대 천왕'이라 불리던 광주일고 허경민, 서울고 안치홍, 경북고 김상수, 경기고 오지환이 한꺼번에 대표팀에 뽑혔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한 '최대어' 충암고 이학주까지 포함해 '5대 천왕'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걸출한 유격수들이 모두 모인 대회에서 주전 유격수는 바로 허경민이었다. 안치홍이 3루수를 맡았고, 김상수가 2루수, 오지환이 1루수로 뛰었다. 외야수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주전 유격수는 허경민이었다.
반대 의견도 있었고,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이종운 전 SK 2군 감독은 "솔직히 객관적인 수비 실력으로는 그때 김상수를 주전 유격수로 써야 맞았을 것이다. 4명의 선수가 모두 좋은 선수들이었지만, 김상수의 수비가 가장 화려했다"고 돌아봤다.
그때 대표팀에서 김상수는 삼성 라이온즈, 오지환은 LG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안치홍 역시 KIA 타이거즈의 2차 1순위 지명이 유력했다. 허경민 역시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은 있었지만, 지명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허경민을 유격수로 쓰자, 오지환과 김상수를 지명한 구단 관계자들의 항의 아닌 항의도 받았다. "우리 1차 지명 선수를 왜 주 포지션에서 안쓰냐"는 내용이었다. 청소년 대회라고 할 지라도, 많은 이목이 쏠린 국제 대회인만큼 포지션 경쟁은 자존심 싸움과도 같았다.
결과는 '윈-윈'이었다. 대표팀은 결승에서 최강팀 미국까지 꺾으며 우승 트로피를 한국에 가져왔고, '유격수 4대 천왕'은 대회에서 모두 맹활약을 펼쳤다. 유격수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 허경민은 대회 종료 후 두산 베어스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이종운 감독은 "다른 선수들은 1차 지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허경민의 동기 부여와 간절함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른 선수들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본인의 역할을 잘해줬고, 결과적으로 대표팀이 잘 풀릴 수 있었던 계기인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2군에 내려갔던 허경민은 SK와의 퓨처스 경기를 앞두고 이종운 감독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에드먼턴 이야기를 꺼내며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이종운 감독은 "경민이가 이렇게 잘 되고, 성공한 것을 보니 정말 뿌듯하다"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허경민도 "감독님을 보니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따뜻하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화답했다.
물론 허경민은 프로에서 유격수가 아닌 3루수로 성공했다. 지금은 아주 드물게 한번씩 유격수로 나가는 수준이다. 미련은 없을까. 허경민은 "유격수는 예전보다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유격수 출신이라 더 잘해야 할 것 같다는 부담을 느꼈었다. 이제는 3루가 내게 잘 맞는 옷인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나유리 기자 youll@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