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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의 '역사속 인물과 와인' ⑤에게르 성을 지킨 도보장군과 '에그리 비카바'

김형우 기자

기사입력 2018-06-04 11:40


헝가리의 영웅 도보 장군<사진=와인리뷰 제공>

헝가리 동북부에 에게르(Eger)라 불리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 있다. 규모는 작아도 예사롭지 않은 고을이다. 입지가 매우 중요해 이 고을을 거쳐야 부다(현 부다페스트),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 비엔나 등의 대처에 닿을 수 있다. 1299년 흥기한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다뉴브 강 건너 비엔나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이 고을을 반드시 밟고 넘어야 할 길목이었다.

1552년 가을 티샤 강 쪽에서 하늘을 뒤덮는 먼지를 일으키면서 오스만 제국의 대군마가 치달아 오고 있었다. 두 갈레에서 에게르로 진격해 왔다. 제 1진은 총사령관 아흐메드(Ahmed)가 본국 아드리아노폴(현 에드린느)에서 출진한 군세였고 제 2진은 이미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부다(현 부다페스트)에서 떠나온 알리 장군(Ali Pasha)의 군세였다. 모두 8만명. 이에 비해 에게르 성을 지키고 있는 도보 장군(Istv?n Dob? de Ruszka)의 수비군은 고작 1,935명에 불과했다.

성을 포위한 제국의 막강한 군세는 취약한 외성의 3개문을 차례로 집중 공격했다. 그러나 차가운 기운이 도는 10월에 들어서도 요새의 군사들이 미동도 하지 않자 오스만 침공군은 초조하기 시작했다. 이미 허물어진 성벽을 통해 포탄을 쏟아 부었으나 지칠 줄 모르고 전투를 이어나갔다. 이 무렵 오스만 군졸 사이에는 이상한 풍문이 돌고 있었다. 에게르 군사들이 피가 섞인 와인을 마시고 죽자 살자 싸운다는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저들이 저렇게 완강히 버틸 수 없다고 믿었던 오스만 군졸에게 이런 풍문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16세기 에게르 성의 혈전을 형상화 한 조각상, 도보 광장에 자리하고 있다<사진=와인리뷰 제공>
사실, 도보 장군은 열세의 군사로 수성을 지속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해서 최후의 일전을 위해 장군은 와인셀러를 열고 고기를 곁들여 군사들에게 양껏 마시도록 했다. 그리고선 성곽으로 올려 보냈다. 와인을 한껏 마신 수성의 군사들은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대면서 광폭하게 저항했다. 성 밑에서 이를 처다 본 터키 군사들은 혼비백산 놀랐다. 아직도 흰 턱수염에 레드 와인을 묻히고 핏자국처럼 뚝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7일, 제국의 군사들은 더 이상 싸울 전의를 잃고 북유럽의 찬 겨울이 닥치기 전 하릴 없이 에게르 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을 개시했다. 38일 간의 포위망 속에서 처절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에게르의 군사는 300명의 목숨을 잃은데 비해 오스만 군대는 8,000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도보 장군의 승전 소식은 전 유럽으로 바람을 타고 번졌다. 당시 터키의 지배를 받아왔던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내 일처럼 반기며 뜨거운 환호로 에게르 승리의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전설적인 에그리 비카바 와인을 빚는데 쓰이는 카다르카 포도종<사진=와인리뷰 제공>
승전의 원동력을 제공해 준 것은 와인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에그리 비카바'. 와인을 빚는 산지는 헝가리 북동부 지방의 에게르. 이 와인을 빚는데 쓰이는 포도종은 카다르카(Kadarka)이다. 달리 이 와인의 별명은 '황소의 피'('bull's blood of Eger')로도 불린다. 질이 좋은 에그리 비카바는 짙은 탄닌, 훌륭한 구조감을 갖고 있어 헝가리 레드 와인 가운데 수작(秀作)으로 친다. 샤프트레이딩(대표 박성환)이 한국시장에 들여오고 있다. <와인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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