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트렌드를 움직이는 사람들, 방송·예술·라이프·사이언스·사회경제 등 장르 구분 없이 곳곳에서 트렌드를 창조하는 리더들을 조명합니다. 2017년 스포츠조선 엔터스타일팀 에디터들이 100명의 트렌드를 이끄는 리더들의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그 마흔 다섯 번째 주인공은 44년차의 대한민국 대표 사진작가, 아티스트 김중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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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중만 작가를 포착한 건 서울 압구정동의 캐논 갤러리에서다. 그는 오래 수석 작가로 함께 작업해오던 캐논과 함께 '캐논X김중만 아트 슈퍼마켓2'라는 이름의 사진전을 열었다. 2016년 첫선을 보인 이 전시는 판매 수익금 전액을 백혈병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는 뜻 깊은 자리. 올해 캐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 김중만은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모습부터 최근 국내 유명 래퍼들과의 초상 작업까지, 140여 점의 소중한 작품들을 기꺼이 내놨다. 작년 프랑스 파리에서 1억 원이라는 가격에 팔렸던 그의 작품들을 이곳에서는 단돈 5만 원에 만날 수 있다. 억을 호가하는 유명 작가에게는 절대 쉽지 않을 일. 그러나 그 용기는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됐고, 누군가에게는 바라만 보던 그의 작품을 더욱 가까이 소유할 수 있는 기쁨이 됐다. 또 그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가능성이자 새로운 길이 됐다. 1억이든, 5만원이든 김중만에게 사진과 예술은 단순한 '아름다움' 그 이상이다. 그에게서 44년 예술가의 철학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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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과의 이번 뜻깊은 협업은 어떻게 진행하게 되셨나요. 그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캐논 수석 작가로 10년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고, 좋은 작업도 함께 했어요. '아트 슈퍼마켓'은 제가 가지고 있던 작품 중 4분의 1을 꺼내 작년에 처음 시도했고, 성과도 좋았죠. 평소 제 사진을 보기만 했던 대중이 저렴한 가격에 예술품을 소유하는 기쁨을 느끼게 했다는 건 좋았으나, 김중만의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젊은 작가들의 시장을 빼앗았다는 아쉬움의 평을 받기도 했어요. 맞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고, 미안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아트 슈퍼마켓'을 하자고 제안한 백화점 등은 거절해왔는데, 캐논에서는 수익금이 아닌 판매액 전액을 기부를 하겠다고 제안했어요. 명분을 떠나서 여러 좋은 의미들이 있구나 싶어 하게 됐습니다. 캐논에서 프린트해주고, 장소도 마련해주고. 저는 두 달여 가량의 시간동안 쉽지 않게 사진을 선정하고 작업했어요. 거의 손해를 보다시피 하는 거지만 사람들이 작품을 가져다 기뻐하면, 그게 좋은 거죠.
-150여점의 작품을 꺼내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음. 작년 전시 때 정말 많은 사람이 왔어요. 길게 줄을 서고 구매하지 못한 분들도 있었는데, 이번에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저에게 팔고 안팔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지금 우리 사회가 조금 힘들고 젊은이들은 어렵고 그렇다고 기성세대도 쉬운 건 아니고. 한쪽에서는 문제있다, 한쪽에서는 문제없다 뭐든 명확하지 않은 세상이니. 좋은 이야기들이 없을까. 그저 아침 뉴스처럼 기쁘고 즐거운 뉴스를 뉴스 내자. 온 국민을 상대로 하진 않지만, 천명, 오백명이라도 여기 왔다가 기분 좋게 몇 시간이라도 행복하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준비했습니다. 어떤 원대한 꿈은 없어요. 부끄럽지 않은 작가의 삶을 가져야겠다 싶네요. 지금 64살인데, 철이 든 지는 10년이에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는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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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처음에는 사실 좋은 예술가가 되어야겠다는 것 이외에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사실 크게 없지만 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 한국의 작가라는 이름으로 인류 미술사에 기록된 한 명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걸 위해 지금 잘 하고 있는지는 스스로 판가름하기 어렵지만 백남준 선생님처럼 사진으로서 역사에 들어갈 수 있는 작가가 되고자 해요. 사실 한국의 사진가로 세계 무대에 나가보면 많은 장벽을 느껴지거든요. 일본 작가들보다 아직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고, 또 홀로 맞서기에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어떨 땐 억울한 부분들도 있죠. 녹록지 않지만, 그래도 후배들보다 먼저 가 길을 터준다는 생각을 해요.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일년에 다섯 장, 열장 파는 것도 쉽지 않죠.
-사실 대중에게 알려진 건 스타들과 작업하는 김중만입니다. 어느 순간 상업사진을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뛰어들었는데, 그 변화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한국에서 가장 멋있는 스타들을 찍는 것도 좋아요. 그러나 젊은 작가나 제자들도 충분히 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나는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자,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작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죠. 2007년에 상업사진을 그만뒀는데, 그 전 1년에 17억 되던 수입이 5천만 원으로 떨어졌으니까요. 돈을 떠나 엄청난 차이에요. 모든 생활권이나 리듬이 깨지는 거죠. 마음을 거세게 먹지 말고 내려놓는 법을 배우자. 굳이 1등이 되려하기 보단 내 작업을 하자 싶었어요. 돈을 많이 벌 때도 주위에서 '너 이런 연봉이면 빌딩을 몇 개 올릴 수 있어' 라고 하면, 제가 '야 그러면 남들이 가는 대로 하면 뭐가 재밌냐'고 했거든요. 물론 요즘 가끔 후회하기도 하지만 하하. 내가 그런 걸 가졌으면 아직까지도 상업적인 일을 해야 했을 거예요. 지금은 제 동네 강북 24평짜리 작업실에서 일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필요한 건 다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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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프리카 파견 외과 의사였고, 실제로 수익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땐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고 대학교 땐 필름 사는 게 소원이었죠. 프랑스에 있으면서 친구들은 아버지가 의사인데, 넌 왜 이렇게 매일 아르바이트만 하냐고 묻기도 했거든요. 그땐 어린 마음에 정말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들인가 상처받기도 하고. 그런데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아버지가 생각했던 인류애 그런 것들. 아버지가 소유하신 게 양복 두 벌, 모자 세 개, 의사 가방 두 개, 청진기 3개, 그리고 모터 달린 자전거. 그게 전부였어요. 저는 지금 하는 것들이 아버지에 비하면 그림자도 못 밟는 형편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네가 아프리카를 위해 뭔가를 하라고 하셨고, 그때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촬영하러 다녔고 이어 동남아시아 그리고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한 지도 5년 정도 됐네요. 특히 녹내장, 백내장이 와서 시각장애를 갖고 사는 어려운 분들이 있어요. 수술비는 3백 정도. 수술만 하면 세상을 볼 수 있는데, 가난한 분들은 죽지 않으니까 안 보여도 된다는 이유로 수술을 안해요. 그분들이 수술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또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힙합 아티스트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는 것, 이건 결과가 안 좋아 속상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아이들을 떳떳하게 보러 갈 수 있겠구나, 그런 마음에서 재도전하게 됐네요.
-작가님의 사진, 그리고 예술 철학이 궁금합니다.
이번 전시는 그냥 게임이에요. 쉽고 즐겁게 들어와서 시간 보내고. 그런 즐거움이요. 그러나 예술의 근본은 결국 인류에게 답을 내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치, 사회, 종교가 가이드라인은 주지만 그들이 줄 수 없는 해답을 보통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 그래서 위대하고 어려운 거죠. 그 답이 그 시대 정신, 나아가 인류 정신에 부합하면 그 사람은 글로벌 작가가 되는 거고, 그게 아니면 내셔널 작가에 머무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싸움에는 굉장히 심오한 부분도, 치열한 부분도 있어요. 어떻게 서양에 있는 작가들과 동양의 작가로 제가 맞설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어떤 소재와 깊이를 확실히 가져야 한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간단히 말해 그 친구들이 못 보는 것들. 서로 가지고 태어난 게 다르기에 그들이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요. 그럼 인정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어떻게든 한국의 작가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그게 제일 쉽고 또 어려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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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대죠. 작가 중에서도 나름대로 소통하고, 자신이 가진 걸 공유하고 또 어떻게 보면 잘난 척도 하고 냉정한 비판을 받아 나은 것을 만들고 싶어하고 그런 생각들이 담겨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관심은 없어요. 우선은 문자를 영어로밖에 못 보낼 정도로 어렵기도 하고 하하. 사실 TV나 인터뷰로 정면에 나서는 것보단 카메라 뒤가 좋고 그 대상이 사람이건, 동물이건 자연이건 그 뒤가 좋아요. 인터뷰는 사실 자선 전시 홍보를 위해 간혹 하고 있지만, 실제로 제가 정말 찾고자 하는 건 그 뒤에 숨은 외로움에 얼마만큼 깊이 들어갈 수 있느냐죠. 사실 아름다움은 두 번째예요. 예쁜 것은 많지만, 일상적으로 툭 지나가며 별로 감흥이 없는 그런 버려진 것들도 많죠. 아름답지 않으니까, 혹은 힘들어서 버려지는 것들은 우리는 잘 볼 수 없어요. 그걸 붙잡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전시에도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사진들이 있는 반면, 일부러 중간중간 웃음거리도 넣고 외로운 것들도 넣고… 관람객들에게 스펙트럼을 넓히려 나름대로 선택 구성한 작품들이에요.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진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나오고 있는데, 이부분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많이 하면 좋죠. 카메라가 점차 발달되고 스마트폰까지 연계가 되다 보니 굉장히 기발하고 빠른 생각들이 전파되고 교류되고. 우리 삶을 더욱 간단하고 편리하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얻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좋아요. 우리 제자들 하는 것 보면 제가 해왔던 방법과도 다르더라고요. 제 거는 아날로그로 하고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하고. 옆에서 보면 참 좋다는 걸 느끼면서도 제 걸 거기에 얹히기는 싫더라고요. 슬로(slow)한 저는 제 길을 가는 거고. 아까 말한 것처럼 뭐가 됐든 작가의 삶이 중요해요. 그 안에 철학이 보이지 않으면 가치가 인정이 안되니까. 작품 몇 개 좋은 데서 끝나는 것 말고, 더 큰 시장을 볼 땐 정말 확실한 정체성과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어느 한 가지 국한된 피사체를 놓고 볼 게 아니라 세상의 것을 담는 것. 영화를 문학으로 치면 소설이지만, 사진은 시와 같아요. 집약되고 압축된 걸 보여주는 것. 끊임없이 써야 하고 읽어 봐야 하고 그 가운데 나의 언어를 찾는 게 사진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좀 더 쉽게 말해 교류를 하는 건 좋지만, 가벼울 수 있고, 또 금방 잊어 버릴 수 있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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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두 가지가 있어요. 지금 딱 보고 좋은 것. 금방 알아채야 하는 것. 그게 상업 사진이에요. 중요한 건 5년 뒤를 생각하는 사진이에요. 막상 별 볼 일 없다고 생각되던 게 5년 후에 괜찮을 때 그런 일상 혹은 예술 사진. 저는 두 가지를 다 경험해봤기에, 좋은 사진의 개념을 알고 있어요. 금방 눈에 띄는 사진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수명을 주자. 사진은 찰나의 예술이지만, 얼마만큼 생명력이 있고 또 시간 연장을 하느냐에 따라 좋고 아니고가 판가름 난다고 봐요. 사실 우리는 6개월 전에 어떤 연예인이 뭘 했는지 아무도 몰라요. 잊어버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고, 우리의 시스템이 소비적이고, 망각적이고. 진화하고 변화해야 하니까. 여기 제 몸에 세월호 희생자의 숫자와 천안함 희생자 46명의 숫자가 새겨져 있어요. 그런 식으로 내가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것들을 기억하려고 해요. 물론 각자의 선택이라 강요할 순 없지만요.
-작가님의 새로운 꿈 혹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나요.
제가 지금 강북 중량천에 살고 있는데, 13년간 중량천 뚝방길 작업을 했어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간 나무들과 이야기를 했고, 2008년 4월부터 2017년까지 나무들의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었죠. 13년 작업의 결과가 잘하면 올해 말, 내년 초에 미국 1위 출판사에서 책으로 나와요. 그게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gina1004@sportschosun.com, 사진=이새 기자 sejong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