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식품, 의학계에서 언제 식탁에 오를지 궁금증을 키우던 '머리 좋아지는 혼합곡'이 마침내 상품화돼 선을 보인다.
두재균 박사는 48세에 최연소 국립대 총장의 기록을 세우며 전북대 총장에 취임한 입지전적 인물로 낭종수술용 두씨흡수관, 두씨탯줄가위, 두씨색시수술법, 위내시경용 마우스피스 등을 개발한 '의사 발명가'로도 유명하다. 전북대 총장 재직 때 전주국제발효식품엑스포를 기획 개최하는 등 식품 산업화에도 관심을 쏟아왔다. 신동화 회장은 전북대 식품공학과 명예교수이자 식품공학 박사로 '순창고추장'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등 중소기업을 돕는 '엔젤 연구가'로 이름이 나있다.
두재균 박사는 "지금까지 인지기능 곡물을 개발하려는 연구에서는 곡식에 특정 물질을 투여하는 방법에 주로 관심을 가져왔지만 우리는 기존 곡식의 영양성분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적절히 배합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을 통하여 그 효과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기술보다는 과학적 효능 효과에 초점을 맞춘 개발품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개발된 혼합곡은 2010년 전북대 의대 정영철 교수팀이 전북대 사대부고 학생 30명을 두 무리로 나눠 9주 동안 기숙사에 기거하게 하면서 한쪽에는 열공, 한쪽에는 기존 기숙사 밥을 먹게 했다. 그 결과 개발된 '열공'을 먹은 학생들은 뇌에서 스트레스 처리와 기억 활동을 담당하는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 뼈에서 칼슘 합성에 관여해 인체성장을 돕는 단백질(S100B)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결과는 지난 해 식품 분야의 최고 학술지 《뉴트리션》 7월 1일자에 발표됐다. 혼합곡을 먹은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았으며 인지능력이 높아졌다. 또 연합 모의고사에서 언어 영역 점수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반면 흰쌀밥을 먹은 그룹은 혼합곡 그룹에 비해 정신적 피로를 더 느꼈으며 언어영역 점수는 변화가 없고 수리영역 점수는 오히려 떨어졌다.
연구진은 2010년 6월 '인지능력 증강용 혼합곡 조성물'로 특허를 받았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곡식을 정확한 비율로 섞는 작업을 사람 손으로 하게 되면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시제품은 완성했지만 일반인의 밥상에 오를 가격에 상품화할 방법이 없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이웃 익산시에서 희소식이 들려왔다. 혼합잡곡 전문회사 '푸르메'가 잡곡 혼합 공정의 자동화에 성공한 데 이어 잡곡의 맛을 내기 위한 압착기술 등에서 진전을 이뤘다는 소식이었다. 푸르메의 기술을 이용해 '열공'의 대량생산에 성공, 9월 첫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혼합곡은 기존 잡곡밥에 비하여 맛이 있고 상품 그대로 밥을 하기 때문에 조리가 편리하다는 게 장점이다.
두재균 박사는 "수험생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지만 스트레스와 싸우는 아버지, 폐경기에 들어서 기억이 자주 깜빡깜빡하는 어머니가 함께 먹어도 좋다"면서 "즉석밥, 삼각 김밥, 떡볶기 등 다양한 관련 상품을 준비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으로 수출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열공 판매수익의 2%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 기부돼 지구촌 어린이의 복지와 교육에 쓰이게 된다.
송진현 기자 jhso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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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재균 박사 스토리>
산부인과 의사로서 '머리가 좋아지는 곡식' 《열공》을 개발한 두재균 박사(58)는 의사로서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을 '무식하게' 돌진해갔다. 큰 귀로 삶의 스승이라고 믿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자신의 이익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잠시라도 멈춰 있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듯, 새 길을 개척해갔다. 평범하고 쉬운 길보다는 재미있고 보람 있는 길을 찾아 늘 자신을 변신했다.
이런 삶의 태도는 그가 최연소 국립대 총장, 100여 개의 특허와 실용신안을 가진 발명가, 의학과 식품학을 접합한 과학자 등 숱한 이력을 쌓게 만들었다.
두 박사는 군산고 때 전자공학 엔지니어를 꿈꾸다 성적이 모자라 의대에 진학했지만 평범한 의대생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예과 때에는 '전북 의대생의 노래'를 작사했고, 본과 때에는 친구 조수철(현 전북대 소아청소년과 교수)과 함께 방송국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본과2학년 때에는 우연히 책방에서 세계미술문고 12권을 사서 작품, 연도, 소장박물관 등을 달달달 외워버렸다. 의대를 졸업하고는 '돈 버는 과' 대신 황인담 전북대의대 초대학장의 권고에 따라 '예방의학과'를 택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입학해서는 시골학생으로 주눅 들지 않고 학생회장을 맡아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보건대학원 김정순 교수를 따라 제주도로 역학조사를 갔을 때에는 고교 때 '발명의 꿈'을 처음 실현했다. 제주도에서 그를 포함한 대학원생들은 모기를 채집해야 했다. 학생 5명에게 볼펜 비슷한 흡입기가 지급됐다. 모기가 보이면 입으로 빨아 당겨 한 마리씩 잡는 일이었다. 주로 축사에서 일해야 했기에 온갖 먼지를 다 뒤집어써야 했다. 시골학생 두재균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몇 시간 뒤 나타났다. 잠자리채에 뚝딱뚝딱 모터가 달린 선풍기를 달아서 왔다. 한꺼번에 수 십 마리의 모기가 채 안으로 빨려들었다. 지금도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수업에서 인용되는 일화다.
두 박사는 1981년 군의무관으로 논산훈련소 수용용대에 발령을 받았지만 '예방의학과' 출신이어서 보직을 못 받고 부인이 안과의사라는 희한한 이유로 '안과 과장' 직책을 맡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신병의 눈만 검사하지 않았다.
그는 훈련병 1만여 명에게 안경처방을 하면서 출신지역, 학력별로 안경을 쓰는 비율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에 대해 통계를 내서 논문을 발표했다. 고학력일수록 안경을 쓰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자 앞으로 안경이 대세라고 결론내리고 그를 돕는 군무원에게 직장을 그만 두고 안경점을 열라고 권고했다. 그 군무원은 고민 끝에 사표를 내고 안경점을 차렸다. 그리고 6개월 뒤 찾아와 말했다. "과장님, 저희 집 냉장고에 고기가 가득 해요.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두 박사는 14개월 동안 새벽4시에 일어나서 병사들의 피와 오줌을 검사하기도 했다. 과격한 군사훈련 때 소금을 먹이는 것이 좋은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 먹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써 '군진의학학술대회'에서 발표, 학술장려상을 받았다.
그는 신병이 4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나면 마른 병사는 살이 찌고 뚱뚱한 병사는 살이 빠진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입증해서 훈련소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 문신이 있는 신병의 부위, 종류 등을 분석했고 군대영장 받고나서 입대까지의 생활, 입영할 때 갖고 온 용돈에 대해서도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두 박사는 1984년 전역해서 전북대 산부인과 전공의로 다시 들어가서도 끊임없이 '발명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했다.
두 박사는 농산물 검사 때 가마를 찌르는 창살에서 힌트를 얻어 물혹 절제 수술용 두씨흡수관을 개발했다. 세계 처음으로 혀를 눌러주는 기능이 있는 위내시경 마우스피스를 만들었고 새 기능의 탯줄가위를 발명하기도 했다.
산부인과 교수가 되자 자궁 근종이나 양성종양환자의 경부를 남기면서 나중에 자궁암 발병률을 낮추는 '두씨 색시수술법'을 개발했다. 미국 토마스제퍼슨 의대, 필리핀 마닐라종합병원, 일본 교토대 등에서 특강 요청이 밀려왔다. 상온에서는 딱딱하지만 혈관 속에서는 부드러워지는 혈관주사도 그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해야 속성이 풀리는 그의 습성은 누군가의 오해를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삶을 나락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두 박사는 군의관 외래과장 시절 내무반장이 사병의 돈을 거두다가 주임상사에게 적발된 것을 듣고 사정을 알아봤다. 내무반에 TV를 사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보통 장교였다면 따끔히 혼내고 말았겠지만, 그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두 박사는 자신의 집에도 없던 칼라TV를 사서 기증했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보안부대의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보안대에서는 신체검사 때 돈을 받은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나중에는 "군의관의 귀감"이라고 존경의 표시를 했지만.
산부인과 교수로서 혈관주사를 개발할 때에는 연구원 2명을 채용했는데 밤새워 연구에 매달리는 연구원들이 너무 고마워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전공의들의 양해를 구하고 그들의 급여를 깎아 이들에게 지급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돼 횡령혐의로 어렵게 오른 전북대 총장직을 물러나게 된다.
두 박사는 2002년 'Doo Can Do'를 슬로건으로 "88한 두재균 8번입니다"를 외치며 전북대 총장직에 도전했다. 모교가 한없이 침체하는 것을 보다 못해서였다. 주위에서도 '한 번 바꿔보자'는 권유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빚보증을 잘못 서 선거운동에 쓸 돈이 없었다. 묘안을 냈다. 다른 후보들이 유력 교수들에게 저녁을 대접하며 운동을 펼치고 있을 시간에 불이 켜져 있는 연구소를 돌아다녔다. 밤늦게까지 연구실을 밝히는 열의에 찬 교수들을 설득해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48세의 나이에 전국 최연소로 국립대 총장에 취임한 것이다.
그는 거점 국립대총장협의회 회장을 맡아 지방 국립대의 부활을 위해 뛰어다녔다. 우림건설의 후원으로 기숙사, 성원건설의 후원으로 법학전문도서관, 제일건설의 후원으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의금을 모아 7000만원을 전북대 생활과학대 장학금으로 기부, 매년 2명이 장학금 혜택을 받도록 했다. 이밖에 전북대 발전을 위해 총장 월급 10%와 원고료, 특강료 등 2억7400만원을 내놓았다.
전북의 발전을 위해서도 뛰어다녔다. 전주국제발효식품엑스포를 기획해서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새만금개발청 신설, LH공사 전북 일괄이전 등을 위해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갑자기 검찰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았다. 연구비 횡령으로 기소를 당한 것이었다. 주위에서는 그가 전북 발전을 위해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가 시민단체의 미움을 받은 것으로 설명한다.
어쨌든 원래 연구계획과 다르게 연구원들에게 돈을 지급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연구실에서의 관례에 따라 돈을 집행한 것이 횡령혐의에 포함됐다. 당연히 변명거리를 찾아서 빠져나가야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관련 사실을 부인하는 대신 그게 무슨 문제냐고 따졌다. 두 총장은 재판이 진행될 때 학생들이 "부패한 총장 물러나라"고 시위를 하자 직접 나서 "나는 (발효엑스포를 정착시켜) 발효는 했어도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교수가 찾아와서 "재출마 선언 포기하고 재판을 뒤로 미루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권유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그러나 법적으로는 그게 문제였다. 그는 총장 임기를 두 달 남기도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옷을 벗어야 했다.
두 박사는 당시 산부인과를 개원해서 쉬운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않은 길'을 갔다.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총장 시절 구상했던 일들을 끝내고자 했던 것.
우림건설이 새 성장동력을 찾는 과정에서 두 박사를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두 박사는 그곳에서 농식품, 실버산업, 병원 수출, 여성병원 체인화 사업 등에 대해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러나 2008년 미국 발 서브프라임모기지 경제쇼크로 우림건설이 감축경영에 들어서자 두 박사는 짐을 싸야만 했다.
이쯤하면 미련을 접고 산부인과를 개원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두 박사는 멈추지 않았다. 기능성 곡식으로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꿈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 미애(美愛)클럽을 만들었다. 총장 시절 그를 반대하며 시위했던 총학생회장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쌀 소포장, 포장 내 질소충전법 등 특허를 만들어서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했지만 동업자에게 2억 원을 떼먹히고 외통수에 몰리게 됐다. 대출금 상환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이 지역에 알려지자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생겼다.
기술보증기금이 전북 부안의 정미소 '등룡RPC'의 김성수 사장(전 부안군의회 의장)을 소개했다. 김 사장은 두 박사의 아이디어를 듣더니 "평소 주위사람으로부터 총장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함께 해야지요"하면서 협력을 약속했다. 김 사장은 미애클럽의 대출금을 전액 떠안고 50%의 자본금까지 출자해서 KND를 설립하도록 도왔다.
두 박사와 김 사장은 머리를 맞대어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아이디어를 짜냈다.
두 박사는 지금껏 기능성곡물은 새 물질을 주입하거나 코팅해서 특정 기능을 향상시키려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재 사람들이 애용하는 곡물의 성분을 철저히 분석해서 최대 효과가 나도록 배합하는 것이 훨씬 과학적이라고 결론지었다.
마침 농림수산식품부가 '고부가 가치 농산물' 연구 과제를 공모한다고 발표했다. 두 박사의 아이디어가 채택됐다. 국제발효식품엑스포 사무처장을 맡을 때 두 박사와 인연을 맺은 전북대 신동화 명예교수가 기꺼이 등룡RPC의 연구소장을 맡았다. 신 교수는 '순창고추장'의 상품화를 비롯해서 중소기업을 도와주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아 '엔젤 연구가'로 불리는 식품공학의 대가이다.
두 박사팀은 수험생, 당뇨병환자, 운동선수용의 세 가지 혼합곡 개발에 성공했다. 수험생용 혼합곡 '열공'은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을 거쳐 식품 분야 세계적 학술지 '뉴트리션'에 발표했다. 당뇨병 환자, 운동선수용 혼합곡도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에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상품으로 보급하려고 보니까 비용이 문제였다. 이 혼합곡의 핵심은 '맛있는 곡식의 정확한 배합'인데 사람들이 일일이 곡식을 섞으면 인건비 때문에 곡식의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것. 이 때문에 개발 2년 동안 상품화를 할 수가 없었다. 두 박사는 대신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가수 현미 등과 함께 현미 보급운동을 펼치며 '농민운동'을 이어나갔다.
뜻밖의 순간에 그동안 연구의 결실을 맺을 계기가 생겼다. 2011년 전북 익산에서 열린 가공식품클러스터 세미나에서 혼합곡 제조사 '푸르메'의 문점식 사장을 만나게 된 것. 문 사장은 미술학도 출신으로 영농업에 뛰어든 또 다른 '아이디어 맨'이었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해 곡식을 자동으로 배합하는 기술과 곡식을 살짝 눌러 최고의 맛을 내는 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두 박사의 꿈을 현실화할 수 있었다. 두 박사는 이제 자신의 전공, 산부인과 의사의 길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이제 꿈이 이뤄지려는 듯합니다. 혼합곡 판매이익은 지금껏 저를 도와주신 분들과 농민들이 가져가면 됩니다. 무엇보다 '열공'으로 청소년들이 똑똑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혈당강화 혼합곡'으로 당뇨병 환자가 건강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익금의 일부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가난 때문에 못하는 학생들에게 쓰이게 된 것도 기쁩니다."
그는 9월 1일 전주 효자동에서 미술관과 진료공간이 결합한 새 개념의 여성병원을 개원한다. 의학과 식품을 융합한 데 이어 이번에는 의대 시절 푹 빠졌던 미술을 의료에 접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