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현장리포트] 지금 일본은..
기사입력 2000-11-27 10:29
'정직' '근면' '기술'. 페루 국민들은 이 세마디를 성경말씀처럼 신봉했다. 그래서 아무 주저없이 그를 선택했고 그리고 이제는 다시 그를 버렸다….
지난 17일， 브루나이에서 있었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에 참석하고 일본에 온 후지모리 페루 전 대통령. 그를 바라보는 일본국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왜냐하면 그는 다름아닌 일본계 페루인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절반의 책임은 어쩌면 일본인들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더 착잡한지도 모른다.
지난 1990년 6월， 일본계 2세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정직과 근면， 기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페루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일본국민들은 그 일을 두고 그저 대학총장까지 지낸 한 인사가 정치적 야망때문에 벌인 단발성 해프닝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페루의 지방으로 가면 갈수록 후지모리에 대한 지지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 때부터 일본언론들과 일본정부는 후지모리의 도전이 하나의 일과성 해프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후지모리가 만약 페루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개발도상국에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ODA차관을 일본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유치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당시 페루의 경제 사정은 최악의 상태였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마약중독과 극도의 빈곤이 만연해 있었다. 페루국민들을 아사직전까지 몰고간 경제적 파탄상태였다. 이 때 일본의 경제적 후원을 등에 업고 혜성처럼 나타난 이가 바로 일본계 페루인 후지모리였다. 결국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작가출신인 바르가스 료사를 누르고 페루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일본국민들의 자부심과 사기는 절정에 달했다. 마침내 미국을 누르고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인 출신이 한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국가수반이 되었다. 페루에 대한 지원 또한 아끼지 않았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고 할만큼 일본인들의 사기는 마냥 충천해 있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좋았다'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한편 후지모리는 '부모의 나라'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페루대통령궁을 일본언론에 수시로 공개했고， 공식 비공식으로 일본에 자주 들렀다. 그의 일본이름은 '겐야'， 부모가 모두 구마모토 출신이었다.
"나의 말은 스페인어지만 그러나 나의 침묵은 일본적이다."
그러나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도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후지모리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적인 애정을 가지고 온갖 종류의 차관을 쏟아 부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절대빈곤을 없애자는 집권초기의 의지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신 그는 일본인 아내와 이혼하고 아랫사람들과 결탁하여 뒷돈을 챙겼고， 두번도 모자라 3선을 위해 96년 강제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그리고 올 4월 세번째 출마에서 갖가지 부정선거를 저지르고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절름발이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당연한 결과지만 국민들과 야당， 그리고 재야인사들이 후지모리 대통령에게 퇴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것을 힘으로 눌러왔던 그….
17일 일본에 도착한 그는 하룻밤에 수십만엔씩이나 하는 일류호텔의 스위트룸에 묵으면서 사임발표를 했다. 잘 살든 못 살든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그가， 그것도 자신의 친정꼴인 일본의 호화 호텔에서 사임발표를 하다니. 페루국민들은 물론 일본국민들조차 이를 묵인한 일본정부에 분통을 터트렸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브루나이 APEC회의에 참석하기 훨씬 전부터 일본으로의 망명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일본국민들이 눈치 못챌 리가 없었다. 때문에 국민들이 더욱 화가 난 것이다. 어린아이라도 비웃을 법한 한 나라 지도자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 그것을 적극적으로 협조한 일본 정부….
"최근 후지모리의 말로는 2차세계대전 중 페루에서 일본계들이 박해받았을 때의 공포감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사태는 후지모리 개인의 일일 뿐 페루 내 일본계 사회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계 사회， 나아가 일본 전체에 나쁜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우리들이 이대로 침묵한다면 후지모리와 같은 공범자라고 볼 것이다. 후지모리는 우리 일본계 부모들의 가르침을 잘 듣지 않았다…."
이 말은 주로 연수비자， 불법체류 등으로 일본 전국에서 단순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일본계 페루인들이 보는 스페인어판 주간지 '인터내셔널 프레스' 25일자에 나온 기사 내용 중 일부이다. 기사 행간에 묻어 나오는 그들의 절박함， 소수민족으로서의 공포감， 돌아갈 수밖에 없는 페루의 미래에 대한 암울함….
그러나 일본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후지모리 페루 전 대통령은 22일， 도쿄시내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