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현장리포트] 지금 일본은...
기사입력 2000-11-26 10:30
요즘 일본 국민들이 두가지 일로 몹시 심란해 하고 있다.
첫째는 자민당 전 간사장이었던 가토씨가 '지금의 일본은 안된다. 대변혁을 일으켜야 한다'면서 모리 수상의 퇴진을 주장하고 내각불신임안을 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꼬리를 내려 잔뜩 기대를 걸었던 일본국민들을 실망시킨 것. 또 하나는 일본의 경제적인 후원에 힘입어 페루의 대통령 권좌에까지 올랐던 일본계 페루인 후지모리가 일본에서 사임발표를 하고 또한 페루의회로부터 퇴출을 당한 채 도쿄시내에서 잠적한 까닭이다.
80년대 말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끝이 전혀 보이는 않는 안개불황. 되는 것도 그렇다고 특별히 안되는 것도 없는 불확실성의 현 시대， 따라서 지지율이 10%(3%라고 보도된 신문도 있다)도 채 되지 않는 모리내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가토씨가 대반란을 일으켰을 때，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일본 국민여론이 어느정도였느냐하면 가토씨가 내각불신임안을 국회에 상정한다고 발표하자 그 때까지 바닥세를 기고 있던 증시가 일시에 일직선으로 뛰어 올랐다. 그것을 보고 모리 수상이 한마디했다고 한다. "내가 그토록 거부되어야 할 사람인가"하고.
"개혁은 정치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인 여러분이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했을 때 처음으로 이 세상은 바뀌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말이 가토씨의 홈페이지에 떴을 때 일본 국민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일본에도 이런 정치인이 있었던가? 신의 나라， 오키나와 교육자들은 공산주의다 등 일련의 실언， 1주일 중 3일은 비밀요정 출입， 진지한 논의와 토론이 없는 자민당내의 비민주의적 경색 분위기，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아무 때나 스포츠관전 등을 하는 비상식적 돌출행동， 그리고 일본의 위상을 전혀 높여주지 못하는 외교능력…. 국민들에 있어 모리내각은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무능한 관료에 지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증시가 일직선으로 한 순간에 뛰어 올랐을까. 그것은 곧 국민들의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그 때부터 가토씨는 여론의 힘을 받아 모리수상을 압박해 나갔다. 그런데 막상 모리수상 퇴진과 내각불신임안이 국회에서 투표에 붙여지는 날 갑자기 가토씨가 항복을 선언했다. 가토씨는 웬일인지 자신의 파벌의원들과 함께 국회에 출석을 하지 않았고 의원투표에서는 내각불신임안이 부결됐다. 완전한 패배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억측이 무성하다. 아사히신문 정치부기자에 의하면， 가토파벌 중 가토씨가 가장 신임하던 의원 세 명이 자민당 수뇌부의 설득에 넘어가 그를 배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사전에 알고 가토씨가 백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본국민들이 가토씨를 용서할 리가 만무했다. 전국에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으며， 언론들은 그럼 지금까지 일본이 바뀌어야 된다고 외쳐 온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 이야기를 듣고 응원해 준 국민들은 무엇이었느냐고 따졌다. 그 날 가토씨의 홈페이지에는 그를 비난하는 국민들의 항의가 일시에 쏟아져 며칠동안 컴퓨터가 다운되는 등 일본국민들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참았던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토씨에게 퍼붓고 있다. 그만큼 일본국민들은 10년이 넘게 계속되는 장기불황으로 이제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 새로운 변화를 간절히 원해 왔다. 이같은 바람이 결국 일순간에 바람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다. 덕분에 코가 석자는 나와 내각불신임안이 부결될 때까지 얼굴 근육조차 움직이지 않던 모리 수상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국민은 울고， 모리는 웃다'라는 신문 제목이 저절로 그려질 정도로 일본 국민들의 낙담은 컸다.
"기대할 게 있어야지 기대를 하지. 수상감이 아닌 인물이 수상이 되었으니 나아지는 게 없지. 게다가 내각은 물론 일본을 움직이는 정치가들이 모두 할아버지들 아냐. 그러니 개혁은 무슨 개혁이야. 늙은이들은 늙은이 식으로 나가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따로 놀고. 그러니 나라가 이꼴일 수밖에. 두고 보라구. 시간이 지나면 일본이 얼마만큼 큰 빚쟁이 인지 드러날 테니. 일본 나라가 부자라는 거 옛말이야. 나랏돈이 바닥이 나고 있어. 그것을 현 모리정권이 쉬쉬하고 있는 거라구. 세금 열심히 낸 우리 같은 선량한 국민들만 불쌍해. 국민연금이 나올둥 말둥 한데도 정치가들은 뒤에서 즈이네들 평생 먹을거 꼬불쳐 놓구. 정말이지 우리 서민들만 불쌍해."
23일 저녁 망년회에서 만난 회사원 아키다씨(52)의 푸념이다. 그는 그날 저녁 내내 한국산 진로소주를 들이키며 연신 중얼댔다. 이대로 일본은 안돼， 안된다구.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