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 칼럼]강우석 레디고-임권택 감독의 유머감각
기사입력 2000-11-20 10:30
우리 시대의 거장 임권택. 그 분의 이름 석자에서 느껴지는 것은 관객에게나 후배감독에게나 아주 특별한 것임에 틀림없다. 메시지가 있는 작품의 중량감， 민족 고유의 혼이 들어있는 작품세계….
상업영화를 만드는 후배감독들에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이끌고 가는 임권택 감독은 든든한 어른이다. 사실 요즘엔 영화감독도 연예인화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임감독에게선 '예술가'의 풍류가 느껴진다. 임감독에게 사인을 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해보면 정말 어쩔 줄 몰라하는 눈빛속에서 경외감이 읽혀진다.
그런데 나는 지난 11일부터 18일까지 방북 영화인단의 일원으로 임감독과 함께 평양을 다녀오면서， 대단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임감독의 '엄청난 유머감각'에 또다른 경외감을 갖게된 것이다. 임감독은 7박 8일의 일정이 너무나 짧게 느껴지게 할 정도로 주위사람들을 연신 웃겼다.
코미디 영화라고 하면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고， 평소에도 남을 웃겨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나로선 은근히 기가 죽기 시작했다. 정말 임감독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선 뛰어난 순발력이 느껴졌다.
하도 웃다보니까， 임감독이 입만 떼면 주위사람들이 웃기 시작하는 '웃음의 조건반사' 또는 '웃음의 전염병'같은 현상까지 벌어졌다. 그것은 마치 포복절도할 코미디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별로 웃기지 않는 장면에서도 웃음을 터뜨리는 현상과 비슷했다.
임감독의 유머를 디테일하게 묘사하기엔 역부족이지만 대충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동행한 영화배우 문성근씨에게 임감독은 "여기에 와보니， 문성근씨는 북한에서 아버님인 문익환 목사님보다도 인기가 떨어지고， 그렇다고 아버님보다 얼굴이 더 잘생겼다고 볼 수 없으니， 아무래도 계속 남한에서 연기생활을 하는 게 좋겠다"는 조크를 던져 주위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정치를 비롯해 각계 각층의 리더로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유머가 풍부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유머는 인간관계를 원할하게 하는 데 중요한 덕목이다. 어떨 때는 유머에서 말하는 사람의 성숙한 내면세계까지 엿볼 수 있다. 나는 임감독의 유머에서도 인간적인 깊이와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었다. 문성근씨와 나는 "우리도 임감독님 나이가 되어서 저 정도의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부러워했다.
남을 즐겁게 하면 자기자신도 즐거워 진다. 그동안 유머감각이 꽤 있다고 자부해온 나는 임감독의 유머를 들으면서 아직 '내공'을 더 쌓아햐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 편이라는 데 자신감을 갖기로 했다. 임감독을 쫓아가기 위해선， 우선 말의 속도부터 줄이면서， 차갑지 않고 따뜻한 유머를 구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P.S〉방북 성과는 이미 각 언론지상에 보도된 관계로 본 칼럼에선 생략했다. 임감독의 유머와 함께 평양일정을 즐겁게 해준 것은 평양냉면이었다. 조미료맛이 나지 않는 정말 담백한 맛의 냉면. 냉면생각만 해도 입에서 군침이 돌고 기분이 상승된다. 식당에 갈 때마다 내가 평양냉면을 먹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질리게 한 게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영화감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