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일본리포트] 지금 일본은..
기사입력 2000-11-20 10:30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시부야나 하라주쿠에서 추는 춤은 바로 가부키의 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 공연을 보기 전 소극장에서 행해진 가부키에 대한 설명 중에 나온 말이었다. 길거리에서 하얀 페인트칠을 하고 제 멋대로 의상을 걸치고 제 맘대로 몸을 흔드는 것이 어떻게 가부키와 같을 수가 있을까? 더구나 가부키는 일본인들에게 있어 일반연극과는 달리 스포츠의 스모처럼 정책적으로 육성되고 국민들에의해 특별관리되고 있는 분야가 아닌가. 그런데 히피족과도 같은 아이들이 거리에서 춤추는 것이 가부키와 일맥상통한다고?
하지만 그말은 참말이었다. 대극장으로 옮겨 가부키공연을 관람하면서 내가 마음 속으로 외친 것은 '나로호도!(과연)'라는 단 한 마디였다.
지금까지 난 가부키공연을 두 번 봤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가부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가나데혼추신구라(假名手本忠臣藏)'-충과 의를 표현한 것으로 아마도 한국독자들은 47인의 사무라이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가 그 중 하나다.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모두 자결한다는 내용의 가부키. 라이벌과의 싸움， 죽음， 거기에 따르는 피비린내나는 혈전의 복수， 그리고 할복자살로 주인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표현하는 47인의 사무라이들…. 무사， 칼， 충성， 의리 등 내용이 한결같이 남성세계를 그린 것이어서 나는 모든 가부키가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난 14일에 본 가부키는 '가나데혼추신구라'와는 달리 스케일이나 그 내용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추신구라'가 TV드라마 '왕건'과 같다면 이 날 본 가부키 '사쿠라희메아즈마분쇼(櫻姬東文章)'는 그냥 인간들의 일상과 희노애락을 그린 일일연속극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만큼 모든 인간군상들이 다 나왔다. 특히 고품격의 웅장한 무대를 상상했던 기대를 정면으로 뒤엎는 첫 장면은 그래서 더 쇼킹하게 느껴졌다.
막이 오르고 관객 앞에 나타난 두 명의 배우， 스님과 미소년이었다. 둘은 마침 자살을 하려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들은 요즘 흔히 말하는 동성애， 즉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금단의 사랑에 대한 세간의 눈총을 못견뎌 죽음을 택하는데 미소년은 바다에 빠져 죽지만 스님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해 혼자 살아 남는다. 그리고 17년 후 스님은 주위의 신망을 받는 고승(高僧)이 되었다.
한편 요시다 가문에 사쿠라히메라는 한 여성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몸종이 없는 틈을 타 곤스케라는 건달의 침입을 받는다. 그 건달의 화술에 넘어간 사쿠라히메는 그와 정분이 나 끝내는 아이까지 낳게 된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분란에 휘말려 사쿠라히메의 부모와 형제들이 살해되고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된다. 집안일을 거들던 사람들은 저마다 재산을 빼돌리고 그녀도 아이를 곤스케에 빼앗긴 채 유곽으로 팔려간다. 유곽에서 그녀는 상류계급(한국의 양반에 해당)만이 사용하는 언어와 유곽녀들이 쓰는 언어를 혼용한 말솜씨로 손님들의 인기를 모은다.
그런데 고승은 사쿠라히메가 17년 전 자살한 그 미소년이 여자로 환생했다고 믿고 또다시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 고승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다른 승려가 이를 문제삼는 바람에 불교에서 파면되고 만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 요시다가문에서 일했던 종의 집에서 요양하다가 살해당한다.
사쿠라히메는 유곽에서 떠도는 사람이 맡겨 놓고 간 아이가 자신의 애인줄 모르다가 환영으로 나타난 고승이 알려줘 비로소 자신의 아이를 안아 본다. 그러던 중 곤스케가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형제도 죽인， 요시다가문을 풍비박산 낸 장본인임을 알고 아이를 죽이고 곤스케도 죽여 버린다.
남자와 여자， 금단의 사랑， 가족과 가문， 불의와 정의， 분노와 웃음， 돈과 명예， 노래와 춤 등…. 현대 사회와도 그 맥을 같이하는 어떤 흐름이 일정하게 '사쿠라히메아즈마분쇼'내용 속에 있었다. 하나의 무대위에서 벌어진 대형 퍼포먼스와도 같은 연극이었지만， 공연을 보고나서는 시부야와 하라주쿠 거리의 춤이 왜 가부키와 연결된다고 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가부키는 과거 사람들이 살았던， 현재도 살고 있는，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손치더라도 식사를 하면서 연극을 보는 것은…. 바로 일본이 그랬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