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雪, 유키, SNOW, 그리고 스키어

스키 CF중에서 제일 재미있게 본 것이 살로몬의 ‘피라미드 스키'입니다.

이집트의 뜨거운 사막.

나귀를 몰고 터벅 터벅 걷던 원주민의 눈에 지평선 멀리서 낙타를 타고 오는 한 사람이 포착됩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그 사람.
그의 어깨에는 길다란 막대기 2개(스키)가 걸쳐져 있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눕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나귀맨:Who are you？

낙타맨:I'm Skier.

나귀맨:Where are you going？

낙타맨:저∼기(말없이 손을 들어 저 멀리 피라미드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 피라미드는 꼭대기부터 절반쯤이 눈에 덮여 있습니다. 모글입니다.
낙타맨은 피라미드를 기어올라 멋진 모글 스킹을 즐깁니다. 점프를 하구 막 난립니다.(나귀맨:허걱∼)
그리곤 다시 낙타에 올라타 어디론가 향합니다.
나귀맨이 황당해하며 묻습니다.

나귀맨:Where are you going？

낙타맨:Wherever there is SNOW.

컴퓨터로 합성한 이 CF는 스키어들의 마음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키어들에게 겨울은 ‘눈이 내려 스키를 탈 수 있는 시기'에 다름 아닙니다. 눈이 없으면 스키도 없을테니까…. 해마다 이 즈음이면 스키어들은 갈무리해놨던 스키를 꺼내 정성스레 닦으며 눈 내리길 학수 고대합니다.

스키를 가능케 해주는 신비의 물질, 눈에 관한 얘길 할까합니다.

겨울철 우리나라에선 차갑고 건조한 북동 시베리아 고기압과 따뜻하고 축축한 저기압대 남서기단이 서로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는데 이 싸움의 부산물이 바로 눈입니다. 남서기단의 습기가 시베리아고기압의 찬 바람과 부딪치는 그 경계선 지역에 눈이 내리게 되죠. 이런 눈은 기압골이 어디에 걸리느냐, 즉 싸움의 최일선이 어디가 되느냐에 따라 강설지역이 남북으로 달라집니다.

영동지방에 가끔 내리는 폭설은 백두대간 덕분에 가능합니다. 동해의 바닷물로부터 발생한 수증기가 구름을 이루고, 이 구름이 동풍에 밀리며 백두대간을 넘어 내륙을 향하다 폭설을 쏟아놓는 거지요.
보통 고도가 100m 높아지면 기온은 0.6도쯤 내려가는데 가파르고 높은 백두대간을 넘으면서 상층부의 찬공기와 만나 눈을 펑펑 쏟습니다.
이 눈으로 득을 보는 스키장은 대관령 아래 용평과 진부령 아래 알프스 두군데쯤 입니다. 영동 폭설 소식에 강원도 스키장을 찾아가다보면 성우나 휘닉스까지는 눈이 전혀 없어 실망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둔내 고개를 넘으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습니다.
눈구름은 보통 둔내고개 전까지 갖고 있던 눈을 몽땅 소비해버려 영동고속도로 둔내쯤을 통과할때는 메마른 바람으로 변하곤합니다. 같은 강원권인데도 고개하나 차이로 자연설 구경하기가 힘든 성우나 휘닉스 입장에서 보면 왕 안타까운 일이겠죠？ 그런데 이 눈이란게 적당히 내려야지 너무 오버하면 큰일납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인공설을 만드는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스키장에 멋진 설경이 연출되는 것은 참 좋죠. 근데 문제는 스키장까지 오는 도로가 눈때문에 엉망이 되는 바람에 막상 스키어들이 많이 찾아오질 못하고 결과적으로 장사가 안된다는 겁니다.

몇년 전 용평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적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큰 눈을 과장되게 표현할때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와야했다'는 얘길하곤 합니다. 바깥에 눈더미 때문에 현관 출입문이 열리질 않아 창문으로 나간다는 의미죠.
그날 저는 진짜로 창문으로 나왔습니다. 마침 용평컵 국제스키대회가 끝난 날이어서 많은 기자들이 모여있었는데 서울로 돌아가려고 주차장에 가보니 차가 안보였습니다. 모두 눈속에 파묻혀버린거죠.
차를 꺼내기 위해서는 포크레인의 도움을 받아야했습니다.
사진기자들이 보기 드문 폭설 장면을 본사로 송고했고 그날 저녁 도하 각 신문은 이 사진을 큼직하게 썼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흥분하지 않는다면 스키어가 아니겠죠? 내 친구도 ‘자연설에서 함 타보자'며 다음날 하루 월차를 내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친구, 운전을 시작한지 12시간만에 눈물을 머금고 중도에서 서울로 차를 돌려야했습니다. 눈 때문에 길이 막혀서죠. 그 주말 용평은 다른 주말에 비해 매출이 40% 이상 떨어지는 쓴 맛을 봐야했습니다. 보통 눈이 내리면 스키장측은 ‘하늘에서 돈이 내린다'며 좋아하지만 이쯤되면 눈이 ‘백색 악마'로 보일 법도 합니다. 눈은 수증기와 낮은 기온 외에도 ‘빙정핵'이란게 있어야 만들어집니다.
빙정핵은 아주 미세한 먼지(성분의 종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입자인데 이걸 중심으로 물방울들이 모여서 얼어붙어 눈송이를 이루게됩니다. 아무리 춥고 구름에 습기가 충분하다해도 빙정핵이 없으면 눈은 없습니다. 빙정핵 없이 물방울 입자들이 모여 눈송이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조직이 치밀하지 못해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다시 수증기로 변해 뿔뿔이 흩어지고 말지요. 물보다 밀도가 낮은 눈의 낙하속도는 초속 30㎝쯤 됩니다. 보통 눈이 만들어지는 고도인 2500m 상공에서 땅에 닿기 까지는 바람 등 외부 영향이 없다고 가정했을때 2시간 10분이 걸리는 셈이죠. 그런데 초속 2m의 바람이 불고 있다면 눈은 생성된 지점에서 무려 17㎞나 떨어진 곳에 착륙하게 됩니다. 가끔 맑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그런 경우겠죠.

눈송이는 널빤지나 나뭇잎 모양의 판상, 바늘 모양의 침상, 기둥모양의 주상 등 3종류가 있습니다. 영하 20도에서 0도사이에서는 판상이 생성되는데 이게 여러개 뭉쳐지면 함박눈이 됩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눈이고 스키에는, 글쎄요 50점쯤? 0도 부근에서는 침상의 눈이 생기는데 2개가 엑스자를 겹치거나 다발을 이뤄 내립니다.
이건 오래 못가는 나쁜 품질의 눈입니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요. 주상의 눈은 영하 20도 이하, 대기가 건조할때 내립니다. 이 눈은 밀도도 있고 결합력이 강해 스키 타는데는 최곱니다. 왁싱이 잘 안된 스키라도 어느 정도 활주성을 보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턴을 할때 멋지게 휘날리는 ‘설파-눈파도'는 이 종류의 눈이 오리지널이죠. 게다가 결정적으로 눈이 꽤 오래갑니다. 눈송이 하나 하나는 매우 가볍습니다. 밀도가 물의 10%에 불과하죠. 그렇지만 이게 쌓여서 다져지면 밀도가 물의 30%쯤으로까지 올라가는데 이 경우 50㎡의 지붕에 50㎝가 쌓였다면 무게가 무려 7.5톤입니다. 75㎏짜리 어른 100명이 지붕에 올라가 있는 셈으로 이 때문에 산골짜기 오두막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사태는 무섭습니다. 눈사태로 후 눌려 다져진 눈은 1㎥당 1톤의 압력을 가집니다. 그런 눈에 깔리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게 되지요.
지난해 겨울 오스트리아의 스위스 접경지역 피츠나운 계곡에서는 폭설 후 눈사태로 50여명이 한번에 희생된 것 기억 하시죠？ 대규모 눈사태는 원자폭탄처럼 후폭풍을 몰고옵니다.
눈에 밀린 공기가 압축됐다가 한곳으로 터져나가면서 발생하는 눈사태 후폭풍은 소리도 우뢰처럼 무시무시하지만 심한 경우 인명을 다치게합니다.
언젠가 스위스의 한 샬레에서는 눈사태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고 안도하며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이 뒤이어 샬레를 강타한 후폭풍 때문에 고막이 터지는 등 부상한 예도 있습니다.
　
〈 송철웅 기자 sim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