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 현장리포트] 지금 일본은...<11/14>
기사입력 2000-11-13 11:30
"구석기 시대 유물 조작사건은 한 개인이 저지른 것일 뿐 일본 고고학계나 그 어떤 조직에서 일부러 행한 것이 아니라구. 물론 아마추어 연구가가 발굴한 것을 아무 검증도 거치지 않고 덥석 교과서에 실은 것은 큰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한일역사 왜곡하고는 관계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야.
유물조작사건은 조작사건이고 극우 역사학자와 극우단체들이 한일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그 자체만을 가지고 비판해야 하는 것이라구. 그런데 한국언론은 일본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일부러 그런 조작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진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그런 짓 안 해. 우월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바로 고고학자들이야. 바보스러울만큼 세상 바람에 초연하고 일본인이냐 한국인이냐 하는 국적에는 조금도 관심없는 순수한 사람들이라구. 그런데 한국언론들은 기사감이 없는데 마침 잘 됐다는 식으로 역사 캐는 일에만 몰두하는 고고학자들을 싸잡아 매도하고 역사왜곡과 연결시켜 일본을 마구 때리는데 그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얘기야. 그냥 아마추어 한 사람의 유물조작으로 봐야 하는 거라구. 물론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등 고고학계나 교육계에 절대적인 치명타를 안겨 주었지만…."
그 기자의 설명은 집요했다. 하지만 한국언론도 아무 근거없이 보도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5일 '동북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 부이사장이라는 사람이 아주 특이한 모습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대개 기자회견을 할 때는 미리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기자들을 정면으로 보며 이야기를 하는데 이날만은 달랐다. 기자회견 당사자인 후지무라씨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갈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가 끼었습니다. 죄값을 받겠습니다. 올해 가미다카모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65점 중 61점은 제가 묻은 겁니다. 그리고 후카이도에서 출토된 29점 유물도 모두 제가 미리 묻어 놓은 것입니다."
이 기자회견으로 일본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역사학계는 물론 후지무라씨의 유물 발굴을 토대로 14종류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일본최고 60만년전의 석기'라고 기술한 교육계， 문부성까지 그야말로 일본 전체가 벌집 쑤셔 놓은 듯이 난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문명(일본인들은 유독 이집트 고대문명을 좋아했다. 지난 4일 그리스에서 20여명의 일본인이 탄 버스가 납치당했다가 풀려나온 적이 있는데 그 버스는 그리스의 고대유적지를 순례하는 단체관광객들이 탄 차였다)에 버금가는 일본의 고대문명이 있다고 큰소리치며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그 내용을 싣는 등 여간 부산을 떤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981년 후지무라씨가 고고학계에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 역사학계에 인정된 것은 1946년 발굴된 2만 5000년 전의 유물. 그랬던 것이 그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50만 년 전 유물 14점(94년)， 60만 년 전의 유물 15점(94년)， 70만 년 전의 유물 31점이 나오는 등 해를 거듭할수록 시간을 마구 거슬러 올라갔다. 후지무라씨가 일본 전국에 걸쳐 발굴해 냈다는 유적지만 해도 도쿄， 후카이도를 비롯하여 총 9개 지역. 이 때 일본 역사학계는 웬일인지 작위적인 냄새가 풍긴다는 일부 고고학자들의 의혹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50만 년 전 베이징 구석기시대의 유물보다 20만년이나 앞선다는 후지무라씨의 말만 믿고 흥분했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유물이 발견된 미야자키에서는 천재적인 상혼을 지닌 일본인답게 '게닌(원인ㆍ原人)라면' '게닌빵' '게닌만두' '게닌인형'에 고대유적지 관광코스 등 수십만 년의 유적지를 아낌없이 상품화 했다. 어떤 곳은 유적지 이름을 내걸고 마츠리(축제)를 해마다 개최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후지무라씨의 유물조작은 학계 뿐만 라니라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피해를 안겨 줬다. 특히 일본 고고학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것이， 후지무라의 업적이 과연 고교 14종류 교과서에 실릴만큼 신뢰성이 있었느냐 하는 것을 전혀 검토해보지 않았다. 앞의 A기자의 말대로 그는 단순히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그가 발견한 것마다 전혀 검증도 거치지 않고 이내 교과서에 실릴 수가 있었는지， 일본주재 한국특파원들의 분석처럼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일본의 역사이기 때문에 중국보다 20만 년 앞섰다는 후지무라씨의 말을 그만 앞 뒤 안 가리고 덥석 기성사실화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일본 역사학계는 후지무라씨가 고고학의 기본적인 용어조차도 모르는 고교졸업의 전기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간과하지는 않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