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박창수, 안경과 인생 처세술
기사입력 2000-11-02 14:00
우리 병원 바닥 한구석에는 다른 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보물창고가 하나 있다.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바닥보다 깊이 파져 있으며 위에서 밟아도 깨지지 않는 두꺼운 유리로 처리된 이 보물창고는 다름 아닌 환자들이 눈 수술(라식수술)을 받은 후 버리고 간 버림받은 안경들을 모아놓은 '안경창고'이다.
사실 내가 아무도 안쳐다보는 구닥다리 안경들을 모으는 이유는， 안경끼고 온 환자들은 어차피 눈수술을 했으니 쓸모없게 된 안경들이지만，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안경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까 해서 모아놓기 시작한 건데 이제는 제법 많이 모아졌다.
이런 애환이 담긴 안경 무덤에서 특히 내가 애지중지 하는 안경은 지난 해에 인사동을 걷다가 골동품 가게 쇼윈도우에서 문득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한 모습에 첫 눈에 반해 거금을 주고 사온 안경이다.
골동품점 주인은 이것이 궁중에서 어떤 참판이 썼던 것이라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강조했지만， 워낙 허풍이 많은 골동품들이니 내시가 썼든 이조판서가 썼든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 안경은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에서 '부의'가 끼고 나왔던 동그런 뻥튀기 같은 안경알에， 시퍼런 녹이 쓸어 있는 수갑 같은 이음새와， 안경 다리 대신 테두리 가장자리에 실을 묶어 귀에 걸게 한 구멍이 있고， 옛날 문갑모서리에 붙어 있는 놋장식 같은 코받침이 달린 세월의 때가 듬뿍 묻어 있는 '오래된 안경'이다.
우리나라의 '안경역사'는 처음으로 들어온 시기는 임진왜란 전인 1580년경에 중국을 통해 전해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안경'이란 것은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즉 '안경'을 윗사람 앞에서 끼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 뿐 아니라 동일공간에서도 끼면 '불경죄'가 되는 존재였다.
그러니 왕같이 높은 분 앞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때문에 그당시 웃지 못할 '안경비화'가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묄렌도르프'의 이야기이다.
'묄렌도르프'는 개화기때 혁혁한 공을 세운 독일인으로 안경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지독한 고도 근시였다.
그가 고종과 처음 만나 인사할때 예의를 지키기 위해 안보이더라도 두꺼운 안경을 벗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인사를 한 것이 고종의 눈에 확∼ 들어 낙하산 관직(?)을 받고 출세한 그런 이야기이다.
그 당시 묄렌도르프가 안경을 벗지 않고 인사만 했었어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을 생각해보니 서양인으로서 자기의 인생관이나 자란 환경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동양의 예법제도에 따라 최선을 다한 묄렌도르프 할아버지가 존경스럽다.
스스로 노력하는 자만이 성공한다는 말처럼， 때와 장소를 가려 자신의 처세를 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박창수 안과 원장 www.lasikclub.co.kr (02)3482-4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