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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갓틸리케'로 칭송받던 사나이는 '슈팅영개'가 돼 쓸쓸히 한국 땅을 떠났다. 한때 '영원한 리베로'로 회자되던 '월드컵 레전드'는 때아닌 의리 논란에 휩쓸려 떠났다. K리그 팬들의 애정을 한몸에 받아온 'K리그 1강' 감독 역시 여론의 포화를 비껴가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A대표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히딩크 감독, 남아공월드컵 원정 16강 후 허정무 감독을 빼고는 명예롭게 퇴진하지 못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된 후인 지난 7월 4일, 신태용 감독이 A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성남 일화, 올림픽대표팀, 20세 이하대표팀 감독을 거치며 신명나는 공격축구로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스타 감독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벼랑끝 승부, 그를 아끼는 이들은 만류했다. "신태용마저 잃으면 안된다"고들 했다. 본인의 도전 의지가 강력했다.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점철된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우즈벡전, 2경기를 0대0 무승부로 막으며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이뤘지만 팬들의 눈높이는 그 이상이었다. 대표팀은 내용보다 '결과'에 집중했지만 팬들은 내용 없는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성난 축구 민심은 신 감독을 향했다. 신 감독과 A대표팀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히딩크 재림설'이 날아들었다. 성난 여론을 뭉치게 하는 강력한 매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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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발언은 2개월 전의 상황이다. 히딩크 감독의 직접화법이 아니라 '최측근' 노 총장의 입을 빌린 '간접화법'이다. 본선 진출 후 히딩크 감독과 통화를 했느냐는 질문에 노 총장은 "오늘 밤쯤 통화할 것"이라고 했다. 대한축구협회와 사전 교감 여부를 묻자 "교감은 아직 없었다. 히딩크 감독이 뭐가 아쉬워서 대한축구협회에 정식으로 오퍼를 하겠나"라고 반문했다. 히딩크 감독이 돈 문제에 개의치 않는다고도 했다. "중국 리피 감독이 연봉을 200억 원 받는데, 히딩크 감독이 먼저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온갖 요청을 뿌리치고 한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미"라고 거듭 밝혔다.
문제는 '재부임설'이 불거진 시점이다. 신 감독이 천신만고 끝에 최종예선 2경기를 마무리하고,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이끈 마당에 히딩크 감독이 뜬금없이 '화두'로 떠올랐다. '감독 흔들기'라는 의혹과 비난도 있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히딩크 선임 가능성을 일축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맡을 의사가 정말 있으셨다면 직접 협회를 통해 연락하셨을 것이다. 이런 논의는 들은 바도 없고, 계획도 없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본선까지로 명시된 신 감독과의 계약을 당연히 존중한다는 것이 공식입장이다.
7일 오전 우즈벡에서 귀국한 '선수단장'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부회장 겸임)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감독 선임과 관련된 것은 기술위원회에서 다루게 돼 있다. 나와 전혀 얘기된 바가 없다. 우리는 신태용 감독을 신뢰한다. 신 감독이 어려운 상황에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그런 지도자에게 히딩크 관련 발언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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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감독은 한국 축구 팬들이 사랑해온 몇 안되는 지도자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그의 언변은 유쾌했다. 1골 먹으면 2골, 2골 먹으면 3골을 넣는, 꼬리 내리지 않는 공격축구에 팬들은 열광했다. 선수, 팬들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그의 축구는 인간적이고 매력적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부담감으로 점철된 이란-우즈벡전, '직진남' 신태용 감독의 "수비에 집중하겠다" "지지 않는 경기를 하겠다"라는 코멘트는 생경했다. 팬들이 지켜본 'A대표팀 사령탑' 데뷔전 2경기는 지면 끝장인 단두대 매치였다. '실리축구'를 했고, 월드컵 9회 연속 본선행이라는'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선수단은 감독을 헹가래치고 환호했지만, 이 장면을 보는 팬들은 불편해 했다. '공격축구의 화신' 신태용의 대표팀이 끝내 골문을 열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이자, 러시아월드컵에서 '신태용 축구'에 바라는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방증이다.
뜬금 없는 '히딩크 논란'이 온, 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군 배경 뒤에도 신태용호를 향한 기대와 실망의 시선이 공존한다. 날마다 온라인 민심은 요동친다. A대표팀 감독은 기분에 따라, 매경기 성적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연속 무득점 무승부가 누구보다 아쉬운 이는 사실 신 감독 본인일 것이다. 지휘봉을 맡겼으면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슈틸리케의 후임으로, 심리적으로 쫓기듯 치른 지난 2경기가 그의 전부일까. A대표팀 사령탑으로서 신태용의 진짜 축구를 보았는가. 지금은 흔들 때가 아니다. 신태용호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신'에게는 길지 않은 9개월의 시간이 남았다. 신태용의 '진짜 축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평소 축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대표팀은 언제나 브라질처럼 플레이하길 원한다. 자국리그는 외면하면서 세계적인 선수가 나오길 갈망하고 선수들이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면 혹독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정당하다고 믿는다." 2007년 핌 베어백 감독이 대표팀을 떠나며 던진 화두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K리그 1강' 최강희 전북 감독이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두 번의 우승을 일구기까지 12년의 세월과 믿음이 있었다. 이란을 '무패군단'으로 키워낸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에게도 7년의 시간이 허락됐다. 우리도 그런 감독을 키울 토양을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하나의 축구팀이 온전히 한 감독의 전술과 철학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열광하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대표팀도 그랬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4강 기적은 한때 '오대영'으로 불리던 사나이를 놓치지 않았던 결과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