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전매특허'인 왼발 크로스는 빠르고 침착했다. 자신감이 넘쳤다. 성큼성큼 안쪽으로 치고 들더니, 박스 안을 향해 과감한 스루패스를 찔러넣었다.
5일 밤, 한국축구의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 명운이 걸린 우즈벡 원정, 후반 18분, 염기훈(34·수원)이 들어섰다. 그라운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날선 측면 크로스에 시종일관 답답했던 공격의 물꼬가 트였다. '백전노장' 염기훈의 움직임은 달랐다. 절체절명의 '빅매치'에서 경험의 몫은 컸다. 긴장감으로 얼어붙지도, 부담감으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팬들이 갈망했던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플레이를 시전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듯, 침착하고 노련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함께 뛰던 후배들도 안정감을 되찾았다. 2006년 10월 8일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첫 태극마크를 단 12년차 공격수의 통산 52번째 A매치다웠다. 2015년 6월16일 러시아월드컵 2차 예선 미얀마전 이후 무려 2년3개월만의 A매치, 염기훈은 '태극마크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이란전에는 기회를 받지 못했다. 우즈벡전도 선발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팀'의 중심에는 염기훈이 있었다. 이란전 이튿날인 1일 우즈벡 입성 직후 '신태용호'가 인터뷰에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베테랑' 염기훈이었다. "우즈벡전은 더 간절하게 뛰어야 한다. 일본이 먼저 올라간 걸 인지하고 있다. 크게 부럽지 않다. 우리도 올라갈 것"이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결과'를 가져왔다. 이란-우즈벡전 벤치에서만 150분,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절실히 느낀 공격라인의 문제점을 스스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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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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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30분의 시간, 과감한 침투패스와 드리블 돌파를 끈질기게 시도했다. 전반 내내 답답한 '고구마' 공격 전개에 지친 팬들에게 염기훈의 자신감 넘치는 움직임은 속이 뚫리는 '사이다'였다. 왼쪽 측면에서 '수원라인' 염기훈, 김민우의 호흡이 살아났다. 염기훈의 노련한 플레이와 드리블, 순도 높은 크로스가 살아나면서 후배 김민우도 힘을 받았다. 측면 플레이가 살아나면서 결정적인 기회도 나왔다. 후반 19분, 염기훈의 크로스를 이어받은 김민우가 왼발 슈팅은 강력했다. 후반 21분, 황희찬의 위협적인 슈팅의 시작점이 된 패스도 염기훈의 발끝에서 나왔다.
염기훈의 투입 이후 한국의 공격은 눈에 띄게 살아난 반면, 지친 우즈벡의 수비라인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염기훈의 헌신적인 활약은 경기 기록으로도 입증됐다. 30분간 19번의 터치, 16번의 패스를 건넸고, 패스 성공률은 81.3%였다. 30분간 2번의 결정적인 찬스를 창출했다. 왼쪽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골 기회를 만들어낸 그의 분투는 '히트맵' 족적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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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KF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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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호는 우즈베키스탄과 0대0으로 비기며 승점 1점을 추가했다. A조 1위 이란에 이어 조 2위를 확정했다. 천신만고 끝에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우즈벡전 후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염기훈은 "벤치에서 봤을 때 선수들이 드리블보다 패스만 하는 모습이 보여서 내가 들어가면 치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했다"고 했다. "베테랑으로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 운영이나 경기장 안에서 한발짝 더 뛰는 모습을 배울 수 있도록 베테랑으로서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박)지성이형, (이)영표형에게 배운 것들을 어린 후배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며 웃었다.
한국 축구 최대 위기, '벼랑끝 승부'에서 베테랑 K리거의 남다른 품격과 헌신이 빛났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 한국 축구의 위대한 계보를 잇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기꺼이 해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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