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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아마추어 행정이 프로 사령탑으로 첫 출발하는 유상철 감독(40)에게 흠집을 냈다.
진두지휘한 김광희 대전 사장의 상식밖 계약에 축구계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전은 17일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유상철 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전격 선임했다. 승부조작의 파문을 딛고 새바람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말 뿐이었다.
김 사장 입에서 직접 나온 얘기다. 김 사장은 유 감독 선임을 발표한 뒤 인터뷰를 통해 "2013년 승강제를 앞두고 있어 내년은 그 어느해보다 중요하다. 이 때문에 섣불리 감독을 선임할 수 없어 몇가지 옵션을 걸었다. 그 부분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계약 해지를 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유 감독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당당히 말했다.
축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발언이다. 신임 감독이 시작도 하기 전에 '계약해지'를 언급할 수 있는 용기가 놀라울 정도다.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언제든 해고할 수 있고, 유 감독이 이를 받아들였기에 자신은 그 책임과 무관하다는 식이다. 이미 왕선재 전 감독을 쫓아내듯 보낸 김 사장의 감독관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감독=파리 목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유 감독을 대전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삼기보다는 당장의 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한 면피용으로 기용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물론 감독직 유지의 열쇠는 구단이 쥐고 있다. 그러나 대전의 계약조건은 여느 구단처럼 단순히 성적 부진에 따른 경질이 아닌 잔여연봉 등 대우조건과 연결돼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줘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김 사장은 유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며 "코치선임, 선수단 운용, 유소년 관리까지 전적으로 감독에게 일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치 선임, 선수단 운용, 유소년 관리는 감독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이다. 그러나 성적에 감독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유소년 관리 등 장기적인 계획을 진행할 수 있을거란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7월 이적 시장이 절반 이상 지난 지금 유 감독이 원하는만큼의 보강이 이루어지기도 어렵다.
흔히 신임 감독이 새로운 팀을 맡아 자기 색깔에 맞는 축구를 구사하기까지는 최소 2~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승부조작 파문으로 많은 선수들과 프런트를 떠나보낸 대전의 상황이라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팀을 바라봐야 한다. 유 감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날개가 접힌 형국이다.
유 감독은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갈 차세대 지도자다. 지도자로서 아직 검증되지 않았지만, 월드컵, 올림픽 등 많은 국제대회를 경험한 준비된 인물이다. 유 감독이 대전을 선택한 것을 두고 '한국 축구를 위한 대승적 차원'이라는 평까지 나오고 있다. 유상철 신임 감독이 대전을 살릴 수 있을까 없을까는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또 다른 논란을 낳기 전에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