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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호' 박훈정 감독의 '결자해지'

김표향 기자

기사입력 2015-12-23 07:23


사진제공=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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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인생사 업보다. 또한 인연이고, 운명이다. 박훈정 감독에게 영화 '대호'가 그런 존재다. 직접 쓴 시나리오. 여러 제작자의 손을 거쳐 몇 년 후 박 감독에게 다시 돌아왔다. '결자해지 하라'는 강권, 압박, 회유와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와 호랑이 사냥꾼의 이야기. 명포수 천만덕(최민식)은 조선 호랑이의 왕이라 불렸던 지리산 대호를 잡으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지만,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힘에 떠밀려 끝내 총을 들게 되고 삶의 벼랑 끝에서 대호와 맞닥뜨린다.

박 감독의 운명도 영화 속 천만덕과 꼭 닮았다. '대호'는 박 감독이 작가 시절인 2009년 6월 완성됐다. 탈고 일주일 만에 판권이 팔렸다. '누가 연출할지 모르지만 고생깨나 하겠구나' 생각했다. 그 고생하는 사람이 훗날 박 감독 자신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천만덕과 대호, 박훈정 감독과 '대호'. 서로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대호'는 박 감독 연출의 '신세계'와 시나리오를 쓴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등 전작들과는 결이 다르다. 사회를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이 한층 누그러졌다. "확실히 제 성향의 작품은 아닙니다. 착한 사람이 너무 많이 나오죠.(웃음) 사실 저는 사내들의 욕망이 득시글거리는 '센' 영화를 좋아해요. 하지만 '대호'의 시대 배경을 그렇게까지 냉소적으로 볼 필요는 없겠더군요. 아련한 존재들이 사라져간 애달픈 시대니까."

'대호'는 제작비 140억원이 투입됐다. 관객 연령대가 넓어 연출 스타일의 변화가 필요했다. 박 감독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 땀을 닦았다. "저는 그냥 청소년관람불가 영화가 편해요. 제 스타일대로 해도 되잖아요. 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와서 볼 테니 부담도 덜하죠. '대호'가 청소년관람불가였다면 100분짜리로 만들 수도 있어요.(웃음) 하지만 '혹시'라는 의문이 뒤따르더군요. 누군가 영화를 이해 못하면 어떡하나 염려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러닝타임은 자꾸 길어지고…. 연출도 기존과는 달랐어요. 저는 좀 냉소적이고 드라이한 편인데, '대호'에선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밀착시켜야 했죠. 어휴,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임에도 연출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호랑이 CG 작업 때문일 게다. 막막함에 수없이 머리를 쥐어 뜯었다지만, 스크린에 구현된 대호는 겉모습은 물론 연기까지 탁월하다. 털의 미세한 질감과 근육의 움직임이 실사인 듯 생생하고, 호랑이의 시야를 대신한 역동적인 카메라는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탄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기술력은 이제 할리우드에 뒤지지 않아요. 문제는 제작비와 시간이죠. '라이프 오브 파이'만 해도 제작비가 '대호'의 11배예요. 저희 나름대로 주어진 여건 안에선 완벽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 CG팀이 정말 고생했어요."


거대 프로젝트가 된 '대호'의 시작은 두 장의 사진이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마지막 조선 호랑이 사진. 그리고 호랑이 사냥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 재벌에 고용된 호랑이 사냥꾼의 사진. 사진 속 사냥꾼의 눈빛에서 슬픔과 자괴감을 느낀 박 감독은 당시 구상 중이던 조선 호랑이 소재를 '마지막 조선 호랑이와 포수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과거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며 살았죠. 필요 이상의 살생도 하지 않았고요. 호랑이와 포수의 소멸을 통해 전통적 가치관의 단절과 그로부터 시작된 욕망의 시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철학이 있는 건 아니에요. 흥미로운 판타지나 옛날 이야기 정도로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박 감독은 창작의 아이디어를 일상에서 얻는다고 한다. 뉴스, 영화의 한 장면, 길에서 본 풍경, 사람들의 대화 등 모든 것이 영감의 원천이다. "어떠한 세계나 계층에 대한 이해, 경험, 지식이 축적돼 있으면 사소한 자극 하나로도 발화가 돼요. 그 불꽃이 번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그런 방식으로 사고하는 게 습관이 돼 있어요. 사실 영화 일 말고는 제가 잘할 줄 아는 게 없기도 하고요."


박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엄청난 '영화광'이다. "학창 시절 동네 비디오가게 두 곳을 작살냈을 정도"로 온갖 영화를 섭렵했다. 보고 싶은 영화를 찾기 위해서 전국의 비디오 총판을 다 뒤졌다. 대구까지 내려가서 구한 비디오를 품에 안고 돌아오던 그날의 가슴 벅찬 설렘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영화가 박 감독에게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박 감독은 영화를 보면서 대사를 받아적고 구성을 바꿔보면서 독학으로 시나리오를 공부했다. 일일이 제작사를 찾아다니며 시나리오를 돌렸고, 군제대 후 공모전에 당선돼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됐다. 그리고 작가로 주목받은 이후 원래 꿈이었던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저는 영화에서 '재미'가 가장 중요해요. 딱 하나의 가치만 골라야 한다면 '무조건' 재미를 선택할 겁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바란다면, 제 영화를 본 사람들마다 해석이 달랐으면 합니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잖아요.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는 관객의 몫이죠. 그러기 위해 관객의 감상을 가이드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대호' 이후의 차기작도 영화팬들의 관심사다. '신세계2'를 고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호'가 성과를 거두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겠죠. 하지만 우선은 좀 쉬고 싶어요. '대호'가 너무 힘들었어요. '신세계2'가 아니더라도, 다음엔 무조건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를 만들 겁니다.(웃음)" suza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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