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착한남자 프리퀄, 절묘한 도플갱어 만들기

김준석 기자

기사입력 2012-10-05 15:34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4일 방송된 수목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8회를 보고 나서야 분명해졌다. 지금까지 방송된 드라마 착한남자 1~8회까지는 본편이 아니라 일종의 프리퀄(Prequel)에 가깝다는 사실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강마루(송중기)의 이야기는 9회부터가 본편이고, 실질적인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기 힘든 타임머신, 타임슬립에 대해, 사람들이 호기심을 멈출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후회'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 그러나 실제로 타임머신은 없다. 시간여행은 실현불가능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느끼는 후회는 어디에서 상쇄시켜 나가야 하나. 결국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다.


드라마 착한남자의 출발은 여기에 기초한다. 매번 등장하는 '착한남자'의 오프닝에서 강마루는 시계를 보고 있다. 시계는 시간을 거슬러 거꾸로 돌아간다. 하지만 마루는 이내 시계를 놓아버린다. 시계는 기계다. 그것은 곧 기계를 통해선 마루가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드라마 '착한남자'가 타임슬립이 가능한 판타지드라마도 아니다.

그래서 착한남자 제작진은 기계가 아닌 사람을 통해, 주인공 강마루에게 '후회'를 상쇄시킬 '기회'를 부여한다. 내(강마루)가 만약 6년 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한재희(박시연)를, 지금 겪고 있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후회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 텐데라고 믿는 그에게, 현재 그를 닮은,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그와 똑같은 길로 접어든 '마루의 도플갱어'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걸 포기한 착한여자 서은기(문채원)를 붙여놓은 셈이다.


드라마 '착한남자'의 1~8회까지를 일종의 프리퀄(Prequel)로 보는 이유도, 착한남자 1회의 강마루와 8회 서은기가 절묘한 대구를 이룰 뿐 아니라, 마치 극이 도돌이표를 찍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1회에서 강마루는 희귀병을 앓는 동생 강초코(이유비)가 너무 아파 응급실로 데려가려 했다. 그 순간 한재희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마루는 아픈 초코를 뒤로 하고 울먹이는 재희를 향해 달려갔다. 그 때 마루는 가족의 안위보단 피끓는 사랑을 택했다. 마찬가지로 8회에선 아버지 서정규(김영철)회장이 위독한 상황이었고, 박준하(이상엽)변호사는 은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마루에 대한 지독한 사랑으로 다른 건 생각할 겨를 없던 은기는 박변호사의 전화조차 받질 않았다. 그리고 은기가 향한 곳은 마루와 함께 가기로 했던 바닷가였다.

미묘한 차이가 있긴 하나, 한재희라는 매개를 놓고 강초코-서회장과 강마루-서은기는 유사한 상황에 노출된 것이다. 즉 착한남자 강마루가 6년 전에 거친 코스를 착한여자 서은기가 밟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란 굴레에 묶인 남녀 강마루와 서은기의 운명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다. 그래서 마루는 타임머신이 아니라 은기를 통해, 6년 전 자신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마루가 재희를 대신해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불안함속에 보내야 했던 5년과 출소해서 제비로 살며 빈껍데기만 남았던 1년, 도합 6년이란 시간은 실질적으로 그의 인생에서 지워내고픈 공백에 가깝다. 그래서 제작진은 마루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마루와 닮은 은기에게는 마루가 겪었던 상처를, 지울 수 없는 공백을 주어선 안 된다고.


마루와 은기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마루의 도플갱어 은기에겐 마루가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미래에서 온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마루가 은기의 사랑을, 그 사랑에 대한 결과를 앞서 경험했기 때문에, 은기에겐 마루와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9회부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터미네이터' 강마루가 감당할 몫이 된다. 단지 마루의 뜻대로 은기나 재희를 비롯해 드라마속 인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주인공 강마루에겐 아킬레스다.

착한남자 8회가 프리퀄로 빛날 수 있던 건, 지독한 도플갱어 '강마루-서은기'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강마루-한재희'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8회에서 재희는 오빠 재식(양익준)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다면서 별장으로 마루를 불러냈다. 그건 재희의 자작극이다. 이를 알게 된 마루는 재희에게 실망하며, 그녀에 대한 사랑도, 복수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냈다면서, 내 인생에 더 이상 '한재희는 없다!'를 선언했다.

1회에서 마루가 초코를 버려두고 재희에게 갔듯이, 8회에서도 은기를 버려두고 재희를 찾았다. 마루에게 은기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발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마루인생에서 마루가 둘일 필요는 없다. 즉 마루가 원하는 과거 그리고 현재가 100% 완성되려면 재희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은기의 가슴절절한 사랑고백에도, 마루가 재희의 연락에 흔들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재희의 자작극은 마루에게 살인죄를 대신 덮어쓴 1회보다 더한 좌절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왔다.

그럼 재희는 왜 자작극을 펼쳤을까. 늘 자신을 지켜주던 착한남자 마루에 대한 기억이고 습관이다. 안민영(김태훈)변호사로부터, 서회장이 자신과 재희의 키스현장을 CCTV로 확인했고 분노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재희는 손에 거의 다 쥔 태산그룹을 딸 은기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움을 느꼈다. 마루를 이용해 은기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사랑때문에 추락하는 서은기를 만들기 위해 그녀도 별장으로 불러냈다.

물론 자작극을 펼치긴 했지만, 막상 마루를 본 재희는 그에게 돌아가겠으니 자신을 받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 순간만큼은 재희의 진심이 보였다. 하지만 재희의 진심이란 순간이다. 일시적이다. 습관이고 관성이다. 재희는 1회에서도 마루에게 같은 얼굴과 같은 눈빛, 같은 눈물로 도움을 청했다. 진심으로 얘기했다. 하지만 마루가 대신 살인죄를 쓰겠다고 했을 때, 그런 마루를 기다리겠다고 말한 재희에겐 이미 마루가 아닌 서회장이 있었다.

태산그룹 서회장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관련 자료를, 기자였던 재희에게 모텔방에서 넘겼던 남자가 있었다. 당시 성적충동을 이기지 못해 재희를 겁탈하려 들었다가 재희가 내려친 병에 맞고 숨졌다. 재희의 행동은 정당방위였고, 마루는 그녀에게 자수를 권했다. 하지만 재희는 태산그룹 서회장이란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루를 속였고 추락하도록 놓아버렸다.

그 당시 한재희와 6년이 지난 시점의 한재희를 '다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제 3자의 겁탈과 자작극은 다르지만, 마루에 대한 한재희의 생각은 같다. 마루는 나에게 착한남자니까 이용해도 이해해줄 거란 나쁜 마음. 살인사건 당시 재희의 뒤에 '서회장'이 있었듯이 6년 후엔 '서은기'가 있었다. 결국 과거나 현재나 재희의 자기복제일 뿐이다. 마루를 속이고 이용한 건 마찬가지. 단지 과거에 마루는 재희의 속내를 읽지 못했고, 현재의 마루는 재희를 꿰뚫어본다는 사실이 다를 뿐.

그래서 착한남자 1~8회가 프리퀄로 완성된다. 지난 8회까지 강마루가 복수를 운운하긴 했지만 재희에 대한 애증으로 수동적인 행보를 걸었다면, 8회를 통해 마루는 재희의 실체를 명확하게 파악했고, 그녀와의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루의 도플갱어 '서은기'를 통해, 마루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 후회를 상쇄시킬 기회를 얻었다는 점.

드라마 착한남자는 9회부터가 실질적인 본편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강마루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토대가 마련됐다. 마루가 재희에게 벗어나기 시작한 9회부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의 본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현재 마루의 눈엔 은기가 자신을 닮은 '착한 여자'로 보이겠지만, 마루에게 은기는 과거에 그가 모든 걸 내놓고 사랑했던 재희보다, 그 이상으로 '사랑스런 여자'로 만들어 줄 것 같은 예감을 낳는다. <한우리 객원기자, 대중문화를 말하고 싶을때(http://manim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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