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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이토록 강직한, 시기 적절한 돌직구

이지현 기자

기사입력 2012-10-05 15:31



때는 광해군 8년, 당쟁은 극심하고 몇몇 대신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에 시달리던 왕 광해(이병헌)는 점점 예민해져만 가고, 도처에 깔린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도승지 허균(류승룡)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긴 대역을 찾아 올 것을 명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왕과 똑같이 생긴데다 목소리도 똑같이 따라 할 줄 아는 만담꾼 하선(이병헌)을 발견해 데리고 간다. 광해가 하선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자신이 지정한 날에 자신을 대신해 궁에 머무르는 것. 배 고픈 천민이었던 하선은 맛있는 야식도 먹고 거기다 돈 까지 받는 일이니, 거기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역할 수도 없었기에 별 다른 고민 없이 그 제안을 수락하고 그렇게 왕이 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광해군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 만약 왕이 이렇게 몸져 누운 것이 문제의 몇몇 대신들 귀에 들어가면 그들을 작정하고 정국을 주무르려 할 것이기 때문에 허균은 광해군이 치료를 받고 환궁할 때까지 자신의 가이드 라인 아래서 왕의 대역을 하라고 명한다. 하선은 그렇게 기생집에서 음담패설 돋는 만담만 하다가 하루 아침에 왕 노릇을 하게 되고, 살벌한 궁에는 조금씩 당황스럽게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예민하기 그지 없고 난폭하기만 했던 왕이 갑자기 웃을 줄도 알고 눈물도 흘리는 인간미 넘치는 모습들을 보여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 <광해>는 광해군 재위 시절, 역사 속에서 사라진 15일 간의 기록을 상상력으로 버무린 히스토리 팩션 사극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는 "숨겨야 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이르다"라는 글귀도 있다고. '비운의 폭군'과 '개혁 군주'라는 극단적인 두 가지 평가 속에 놓여있던 왕 광해를 영화는 '진짜 왕'과 그를 대신한 '천민 대역'이라는 설정으로 풀어낸다.

왕 광해는 조선과 조선 백성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게 된 인물이다. 원래 그는 전쟁 속에서도 백성들을 향해 따뜻한 마음을 내보이는 걸 감추지 않았던 젊고 어진 군주였지만, 그를 반대하는 정적들을 그를 사방팔방으로 위협하기 시작했고, 광해는 그들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지쳐서 점점 귀와 마음을 닫게 되었다. 반면, 하선은 왕으로서의 타고난 체통과 위엄은 없더라도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측은지심과 따뜻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이다. 열다섯 어린 소녀가 당한 불의에 같이 눈물 흘릴 줄 알고, 자신이 뱉은 약속은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하며, 자신의 안위보다는 내 사람들과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을 소중히 지키길 염원하는 사람이다.


광해와 하선, 둘 중에 진정한 군주로서의 품격은 누가 가지고 있는 건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천민 하선이 쓰릴한 왕 노릇에 담긴 해학들과, 그리고 용상에 앉아서 진정한 군주로서의 꿈을 꾸기 시작한 하선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진심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영화 <광해>는 하선과 하선에 의해 변화되는 사람들을 통해 러닝 타임 내내 굉장히 올곧고 강직한, 가슴에 콱 박히는 돌직구를 던진다. 대선 관련 이슈들로 한창 시끌시끌한 요즘에 참 시기 적절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노린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광해>는 심심하거나 지루할 새가 없는 영화였다. 이 스토리 플롯이 뻔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한 부분에서는 좀 밋밋해질 법도 한데 적당히 코믹하면서도 찌르르하게 심금을 울리는 등 배우들의 호연을 등에 입은 스토리는 좀처럼 축 처지지 않는다. 그리고 색감이나 영상미가 주는 시각적인 재미는 물론, 잔잔히 깔리는 BGM들의 청각적인 재미도 훌륭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특히 이병헌씨는 정말 압도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그 장악력과 아우라에 행복한 131분이었다. -이병헌씨 목소리 때문에 이 영화를 한번쯤은 그냥 듣고만 싶어지기도(..)- 역시 어떤 장르 속에서나 반짝반짝 살아 남을 수 있는, 영민하고 뛰어난 배우라는 걸 다시 한번 입증하신 듯. 묵직한 무게감을 선보이신 류승룡씨는 역시나 기대했던 것대로 좋고, 코믹한 이미지로만 기억되던 김인권씨의 진중한 모습도 보기 좋았다. 그리고 러블리한 심은경양은 다시금 그녀의 20대를 기대하고 싶게 만들었다.

어쩌면 <광해>가 올해 본 한국 영화 중에서 베스트 작품이 될 듯. 올해 우리 영화들을 그리 많이 챙겨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 영화들이 확 와 닿을 정도로 좋았던 적은 없었는데 <광해>는 진심, 정말, 매우 좋았다. 재 관람 의욕은 물론 DVD 구매 의욕도 당연히 상승. 간만에 좋은 시나리오, 연출, 연기, 세 박자가 완벽하게 딱 합을 맞추는 영화가 나온 것 같다. 대중들을 타겟으로 한 상업영화의 올바른 사례랄까 :) <토오루 객원기자, 暎芽 (http://jolacandy.blog.me/)>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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