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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 프로젝트> '하정우 쇼'의 탄생

임기태 기자

기사입력 2012-09-05 15:16 | 최종수정 2012-09-05 15:29


<577 프로젝트>는 정체가 모호하다. 하정우가 동료 배우들을 데리고 국토대장정을 하는 일종의 다큐멘터리인데,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도 엉뚱하고 다큐와 예능 프로그램을 섞어 놓은 듯 특이한 구성을 보여준다.

일단 <577 프로젝트>를 얘기하기 위해선 2011년 5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날 열린 47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하정우가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시상자로 등장한다. 2010년에 이 상을 받은 하정우는 이날 <황해>로 또 다시 후보에 올랐다. 그래서 함께 시상자로 나선 하지원이 "이번에 또 상을 타면 국민 앞에서 공약을 하나 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랬더니 하정우가 "또 상을 받으면 트로피를 들고 국토대장정을 하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하정우는 이날 상을 탈 거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공약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국토대장정이 어디 동네 산책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그가 펼쳐 든 수상자 명단엔 '하정우'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국토대장정을 하게 된 하정우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출발해 해남 땅끝마을까지 577km를 걷는 영화 <577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혼자서 국토를 대장정하기엔 억울했던 모양인지 하정우는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우선 당시 영화 <러브 픽션>을 함께 촬영하던 공효진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또 하정우의 친동생이자 역시 배우로 활동 중인 차현우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의 전성시대>에 함께 출연한 김성균 등 혈연, 지연, 학연을 총동원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까지 열어서 16명의 대원을 모집하기에 이른다.


하정우와 공효진을 뺀 나머지 열여섯 명의 출연진은 신인 혹은 무명 배우들이다. 이중엔 하정우와의 친분 때문에 합류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목적이 클 것이다. 하정우가 일반인이 아닌 동료 배우들과 배우 지망생을 선택한 이유 역시 다른 데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거다. 하정우와 함께 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름을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는 배우들, 생활고에 시달리고 가족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담아내는 것이다.

국토대장정이라고 하면 젊음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패기 넘치는 분위기와 거창한 목표의식도 느껴지고. 하지만 여기서의 국토대장정은 아주 즉흥적으로 시작해서 흥미 위주로 진행된다. 하정우가 공개적으로 약속한 일을 지키기 위해 국토대장정을 추진하고, 공효진을 비롯한 배우들이 동행하는 과정을 최대한 즐겁게 담아낸 것이다.

문제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자료화면으로 막을 여는 영화는 하정우가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시간 순으로 차근차근 보여준다. 이 속에서 국토대장정에 대한 정보도 비교적 상세히 제공하고 참여한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 지도 알려준다. 2011년 11월 15일 서울 예술의 전당 앞에서 모인 일행은 20일 동안 하루 30km, 평균 8시간 이상을 걸어 해남 땅끝마을에 도착하는데, 영화는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리얼하게 담는다.

그렇다고 단지 국토를 대장정하는 과정만 담은 건 아니라 배우들의 끼를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배치했다. 하정우가 토크쇼를 열어 출연 배우들의 매력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배우들은 모노드라마나 고해성사 같은 코믹한 영상을 찍어서 재능을 뽐내기도 한다. 협찬사 물품을 노골적으로 광고하는 CF에선 풍자적인 재미가 돋보인다. 또 관객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몰래 카메라에서는 배우 아니랄까봐 놀라운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특별한 시나리오 없이 출연진들의 생생한 모습으로만 진행되는 이 영화에선 다채로운 캐릭터와 개성을 지닌 이들의 모습을 만나 볼 수 있다. 유쾌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이가 있는 반면, 버릇없는 막내도 있고, 미스춘향 출신의 단아한 미인부터 카사노바 스타일의 미남까지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갱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면 인기 연예인들도 분량 욕심을 내며 조금이라도 카메라에 더 많이 잡히고 편집 당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나. 이 영화도 똑 같은 게, 하정우와 공효진을 제외한 16명의 출연진들 중에서도 존재감을 빛내는 부류가 있는 가하면, 묻혀버리는 인물들도 있다. 아마도 <577 프로젝트>를 통해 가장 많은 관객에게 각인된 배우는 이지훈과 한성천, 이승하일 것이다.


스스로를 '아침 드라마 계의 장동건'이라 칭하는 이지훈은 잘 생긴 얼굴을 배반하는 경망한 행동으로 영화의 웃음을 상당부분 책임진다. 또 한성천은 무명 배우의 설움을 가장 크게 간직하고 있는 캐릭터로서 감동과 놀라움을 담당했다. 막내인 이승하는 거침없는 말투와 성격으로 제작진과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코고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사실 그때 하정우가 국토대장정 얘기한 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설사 기억하더라도 왜 국토대장정 안 하냐며 따져 물을 이도 몇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577 프로젝트>는 하정우의 기획력과 추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 해도 그만이고 혼자만의 국토대장정으로 끝내고 말아도 됐을 일이지만, 직접 제작진을 구하고 출연진을 섭외해 한 편의 영화로 완성시킨다는 것은 웬만한 근성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577 프로젝트>는 '하정우의 영화'다. 하정우는 영화 속에서 리더로서의 역할도 잘 해내는데, 힘들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대원들을 이끌며 대장정을 무사히 끝내기 위해 노력한다. 또 토크쇼와 몰래 카메라에서는 놀라운 개그 감각과 진행 능력을 자랑한다. 단지 연기만 잘 하는 배우가 아니라는 점을 이 기회에 톡톡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거다. 국토대장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사실 너무 뻔하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곳곳에 재기발랄한 코너를 배치해 흥미를 끈다. 국토대장정이라는 의미 있는 행동을 전면으로 내세우기보다 그 속에서 재미를 만들어내고 찾아내는 것이다. 이상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영화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하정우가 국토대장정을 또 한다고 말해 버리는데, 그가 또 어떤 일을 꾸밀지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정미래 객원기자, FILMON(http://film-on.kr/)>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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