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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영화에서 고양이는 흉물스럽다. 피를 핥아 먹고, 새된 울음소리를 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무섭게 으르렁거리고, 떼로 나타나서 사람을 공격한다. 무엇보다 고양이가 나타난 곳에서는 의문사가 잇달아 발생한다. "귀신 들린 고양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전혀 무섭지 않다. 공포영화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물론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장면은 많다. 또 깜빡거리는 형광등, 갑자기 등장하는 치매 노인, 음산한 지하실 등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익숙한 전략이자 상투적인 연출이다. 깜짝 놀라는 것과 공포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정이다.
그런데 핵심 장치인 소녀의 원혼과 고양이를 연결하는 끈이 느슨하다. 소녀의 죽음의 이유도, 그 장소도 상투적이다. 긴장의 강도를 높여줘야 할 사건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산만하게 나열된다. 예를 들어 고양이를 새로 입양한 보희의 죽음과 단발머리 소녀, 비단이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된다. 예상 가능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쯤에서 소녀의 원혼과 고양이가 나오겠군' 하고 생각하면, 영화는 여지없이 그 장면을 보여준다. 예고된 공포는 이미 공포라고 말하기 힘들다. 답답한 이야기 전개 속도, 어설픈 멜로, 소연과 아버지의 사연, 정신과 상담 장면들도 서사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감독의 의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인물의 성격에서 알 수 있다. 소연은 어린 시절 충격으로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고, 아이는 아파트 지하실에서 외롭게 죽었고, 유기된 고양이들은 안락사를 당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 타자들의 문제를 장르영화에 담으려 한다. 공포영화의 기본 공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런 소재들을 나열할 뿐이다. 그래서 메시지 전달에 실패한다. 공포영화로 성공했다고도 말하기 힘들다. 기획뉴스팀 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