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성의 스타 따라잡기] '밉지않은 악녀' 하지원
기사입력 2000-11-26 10:30
하나의 밀알이 썩어 대지를 기름지게 하듯 연기자에게는 자신을 던진 연기로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하루 아침에 탄생하는 반짝 스타가 아닌 실력으로 롱런하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과 타고난 재능， 그리고 희생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밀알의 정신이나 인고를 깨닫기에 하지원은 아직 어린 새내기 연기자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기에 대견스러운 연기자다.
하지원을 보면 아무리 악녀라고 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목조목한 코와 입은 여린 인상을 주지만 커다란 눈에서 흘러나오는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는 영락없는 필름 느아르의 '팜므파탈'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속 깊고 톡톡 튀는 스무살의 하지원은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하지원이라는 예명을 가지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부르기도 쉽고 예쁜 이름을 찾던 중 그녀의 매니저가 '하지원'을 제의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바로 매니저의 첫사랑이 하지원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첫사랑과 이름이 같은 여자의 그림자가 되었으니 그녀의 매니저도 소원풀이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영화 데뷔작은 대선배 안성기와 함께 한 '진실게임'이다. 이 영화에서 광기 어린 스토커를 리얼하게 소화한 하지원은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 여우주연상을 따내며 차세대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동감'과 '가위'에 출연하며 다양한 이미지를 연기해내더니 최근에는 드라마 '비밀'(연출 김사현)을 통해 다시 한번 악녀 굳히기에 성공했다. 그녀는 시청자의 미움 어린 눈빛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어른스럽고 영악하다. 하지만 순수하다.
그래서 하지원은 새침떼기 시누이처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연기자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하지원의 목표가 배우라면 그녀에게는 천의 얼굴이 필요하다. 때로는 천사로 때로는 악마로 변신하면서도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 다행히 하지원에게는 이런 가능성이 엿보인다.
'동감'의 청순하고 어여쁜 여대생에서 언니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가는 '비밀'의 지은 역까지 하지원은 살아있는 눈빛으로 다채로운 연기를 펼쳐왔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기본에 충실한 연기자는 수없이 명멸하는 반짝 스타 사이에서도 한치의 흔들림이 없으리라 본다.
〈MTM 대표 대경대 방송연예과 교수 www.mtm.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