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모의 시네마 리뷰] 필로우 북
기사입력 2000-11-26 10:30
현대 영국 영화의 미켈란젤로라고 평가받을 만한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필로우 북'은 주인공 나키코(비비안 우)를 통해 본 비범한 여자의 일생 이야기이자 매우 색다른 문화적 탐구를 자극하는 영화다.그녀의 고모는 천년 전 황실의 여인이었던 세이 쇼나곤이 자신의 개인사를 시로 표현한 일기를 읽어주며 나키코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한 남편 제롬(이안 맥그리거)에 대한 그리움 이 뒤늦게 깨달음으로 온다. 따라서 나키코는 그녀의 어린 딸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제 어린 딸에게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질 차례다.
그러나 '필로우 북'은 대중적인 관점에서 보면，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는 영화로 견해가 뚜렷히 갈릴 영화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에게 있어 육체는 스크린이요， 종이다. 몸에 쓰여진 것은 감정과 사상의 응집이다. 광기어린 출판업자가 그 가치에 매료되어 그것을 영원히 한권의 책으로 소유하기 위해 그 몸에 손을 댄다면， 그것은 매우 끔찍한 것이다.
나키코의 아버지는 그녀의 생일이 돌아오면 반드시 그녀의 이마와 양쪽 볼 그리고 몸에 붓글씨로 이름과 생각을 새겼다. 마치 진흙으로 빚은 자신의 조각에 뜻과 생명을 불어넣는 의식을 행하듯이 말이다. 나키코는 제롬의 권유를 받아들여， 자신의 육체를 종이 혹은 화선지의 역할을 넘어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일기를 표현하기에 이른다. 어릴 때부터 몸으로 기억해 온 쇼나곤의 '필로우 북'에 대한 추억이 자신의 서예로 되살아 날 때 그것은 천년의 시간과 천년의 한이 함께 묻어나오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녀의 글에 대한 발전은 동시에 창조적인 열정과 어우러지게 된다. 그녀는 출판업자에 대한 아버지와 남편 제롬의 복수를 13권의 책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육체에 쓰여진 책의 테마는 방황 순수 무기력 유혹 젊음 비밀 침묵 배신 죽음 등이다. 13번째 죽음의 테마를 몸에 지니고 온 자객의 손에 살해되는 늙은 출판업자를 보고 나서， 이윽고 나키코의 생활에 평안과 고요가 찾아온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딸의 이마에 글씨를 쓴다. 자신의 창조물을 소중히 여겨 생명을 불어넣는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은 제3자의 시선으로 일본 문화 혹은 동양문화를 속살 깊게 파헤쳐 은유적이고도 비수적인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의 서사적 비전과 차별화된 상상력 등 영화의 새로운 형식에 대한 탐험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