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 역사무협소설 '반역' 금귀<16>
기사입력 2000-11-02 11:30
연미는 사내가 손을 잡았을 때부터 사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스무살 쯤 되었을까?
6척 장신에 건장한 체격이었고 짙은 눈썹에 두 눈은 타오르는 횃불처럼 이글거렸으며 굵은 콧날과 두툼한 입술은 다부졌다. 그리고 무명 바지 저고리에다 머리에는 가죽 두건을 썼는데 가문있는 집안의 여행자 차림이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사내가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더니 빙긋 웃었다. 그 순간 두근대던 연미는 가슴이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조금 어지럼증이 날테지만 곧 진정이 될것이오. 그동안은 이곳에서 쉬시오."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한 사내가 봇짐을 뒤지더니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콩알만한 환약 하나를 안에서 집어 연미에게 내밀었다.
"해독환이요. 물 없이 그냥 삼키시오."
"고맙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한 연미의 두 볼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때서야 월녀가 다가붙더니 연미를 보았다.
"아씨， 괜찮으세요?"
"응. 괜찮다."
머리를 끄덕여 보인 연미가 마악 봇짐을 들고 일어서는 사내에게 물었다.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요? 소녀의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만."
"광주에 사는 박세진이오. 무과를 보러왔다가 천불사 구경을 가는 길이었소."
"소녀는 정연미라고 합니다. 성문 안 인사동에 살고 있지요."
머리를 끄덕인 사내가 아직도 환약을 들고있는 정연미의 손을 보았다.
"어서 약을 드시오."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연미가 약을 입 안에 넣더니 침을 모아 삼켰다.
"그럼 소인은 먼저 가겠소이다."
머리를 숙여보인 사내가 몸을 돌렸을 때 연미는 다급한 듯 일어섰다.
"나리， 저 좀 보세요."
활달한 성격에 총명해서 정종의 극진한 귀여움을 받고있는 연미였지만 외간 남자를 불러 세운 것은 난생 처음이다. 사내가 돌아서자 연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리， 은혜를 갚도록 기약을 해 주십시오. 그대로 가시면 어떡합니까?"
"당연한 일을 은혜라고 하시니 부끄럽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사내가 지긋한 시선으로 연미를 보았다.
"내가 곧 무과를 볼 사람이오. 그래서 낭자의 청을 받기가 더욱 난처하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낭자는 병판 대감의 영애가 아니시오? 인사동에서 정씨 성을 쓰는 사대부댁 낭자는 아마 낭자 뿐일것이오."
맞는 말이었으므로 연미가 초조한 시선으로 사내를 보았다.
"그것이 어쨌단 말씀입니까?"
"내가 곧 무과를 볼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병판 대감의 한 말씀만 계시면 당장에 등과가 될테니 그것이 싫단 말씀이오."
그리고는 사내가 눈만 깜박이는 연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내 힘으로 등과를 하고나서 낭자께 사례를 받겠소이다."
다시 사내가 몸을 돌렸으므로 연미는 일어나 한걸음 다가섰다.
"나리， 올해 칠월의 무과 별시는 없습니다."
그러자 사내가 머리만을 돌려 연미를 보았는데 정색한 얼굴이었다. 연미가 한걸음 더 다가섰다.
"소녀가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태평성대여서 내년으로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허어. 낭패로군."
사내가 낙담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