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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정현석 김성원 김가을 기자]푸른 용의 해,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세월은 각양각색으로 춤춘다. 3년 만의 만남이지만 시간은 그저 무늬였다. 37년 전 '서울의 봄'을 함께한 두 사람. 여운은 변하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면 둘의 시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홍 감독은 대학교 때 국가대표에 발탁돼 1990년 2월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 해 이탈리아월드컵에 출전하며 '영원한 리베로'의 탄생을 알렸다. 반면 염 감독은 운동과 담을 쌓았다. "대학교 때는 명보가 바빴다. 사실 나는 노느라 바빴고, 야구는 취미로 했다. 그때만 해도 야구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 프로(무대) 갈 생각도 없었다. 한량으로 살 때였다. 압구정동 카페 주인이 내 꿈이었다. 대학 때 압구정동에서 살았다. '카페를 어떻게 할까? 여기다 카페 차릴까?', 이런 생각이 더 많았다."
홍 감독이 웃었다. "대학교 때 성실하게 운동만 한 놈들이 어디있어. 난 4학년 때는 학교에 있으면 고참이었는데. 대표팀에 나가는 바람에…"라고 말끝을 흐린 후 "대표팀에서 막내였다. 그래도 우리 동기들은 잘 지냈다"며 쑥스러워했다. 홍 감독은 일찍 핀 '꽃'이다. 이탈리아를 필두로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2002년 한-일 대회까지 4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A매치 136경기에 출전한 그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역사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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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1년 반 있었다. 그 전보다 생활이 힘들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때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했다. 재미도 있었다. 2014년 월드컵은 커리어에서 가장 좋지 않았지만, 반대로 거기서 배운 것도 많다. 만약 그것마저 성공 했다면 지금의 삶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염 감독의 선수 생활은 화려하지 못했다. 마음 먹은 대로 프로에 입문, 빠르게 주전을 차지해 센스 만점의 내야수로 활약했지만 빼어난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 2000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다소 일찍 선수 커리어를 마감했다. 프로 통산 성적은 타율 0.195, 홈런 5개, 타점 110개, 도루 83개. "2차 1번으로 프로 왔는데, 주전은 해봐야지 했다. 좀 하니까 또 주전을 했다.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얻었다. 쉽게 얻으면 그걸로 끝이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가 아닌 프런트로 첫 발을 뗐다. 2013년에는 넥센의 지휘봉을 잡으며 새 장을 열었다. SK 단장에 이어 감독까지 했다. 하지만 감독으로 끝내 우승이란 '해피엔딩'은 없었다.
이런 두 사령탑의 '인연'을 다시 이어준 것은 우승이다. 둘은 계묘년을 호령했고, LG와 울산의 사령탑으로 정상에서 만났다. 2연패의 홍 감독보다 지도자로 생애 첫 우승의 환희를 만끽한 염 감독의 할 말이 더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우승 못 한 감독이란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LG가 '29년의 무관'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난 여기서 우승을 못하면 감독을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멤버로 우승 못하면 내가 감독으로서 실력으로 부족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첫 해에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최고가 될 수 없으면 접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팬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감독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런 생각으로 했다."
배수의 진을 친 염 감독의 절박했던 도전에 홍 감독은 한 차원 다른 이야기로 화답했다. "17년 만의 우승도 그 정도인데, 29년은 더 하지. 하지만 난 또 다른 부담감이 있었다. 그게 어떤 부담감이냐면 한 번은 할 수 있잖아. 그런데 두 번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다들 2023년에도 우승해야지 진정한 우승이라고 하더라. 한 번 우승했으니까 또 우승해야 진정한 것이 된다. 우승이라는 것은 언제해도 좋긴하다." 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우승에도 이유가 있다. 두 사령탑의 우승 리더십은 다른 듯 하지만 묘하게 얽혀있다. 현실 진단부터 정면돌파였다. 염 감독은 "LG의 최고 단점은 우승을 위한 구성을 갖추고도 고비가 오면 넘기지 못하는 망설임과 두려움이었다. 나는 첫 번째, 그걸 없앨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결국 생각한 게 '뛰는 야구'였다"고 토로했다.
홍 감독은 "울산은 준우승만 수차례 한 팀이었다. '위닝 멘탈리티'가 정말 중요했다. 결국 선수들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깨는 것이 리더십이었다. 축구 경기는 1~2일 전이 정말 중요하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전북 현대 얘기만 나와도 선수들이 주눅 들었다. 그래서 전북전을 앞두고는 전날 구단 직원들을 모아서 조기축구를 하곤 했다. 이젠 전북을 만나도 더 편안하게 놀면서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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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즌을 치르려면 늘 좋을 수가 없다. 춘하추동이 녹아있다. 노하우는 있다. "야구는 감독이 사인을 주면 그라운드에서 따라야 하는데 축구는 그렇게 못한다. 내보낸 뒤에는 선수 교체, 그것도 한 세 명 정도, 가끔 성질이나 화를 한 번 내도 못 들을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의 셀프 파워, 경기장에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정, 책임질 수 있게 하는 분위기를 생활에서도 많이 하려고 한다. 내가 중요한 것은 주지 않지만 쉬운 건 준다. 그걸 받으면 자기들이 결정하고 좋은 쪽으로, 자기들이 편한 쪽으로 할 수 있다. 그 뒤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홍명보)
"경기에서 내 얼굴이 변하고, 상황에 따라 표정이 변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화면을 봤을 때도 감독이 얼굴이 드러내는 것이 싫어서 억지로 무표정한 연습을 했다. 그게 습관이 돼 이제 똑같은 표정이다. 선수들에게도 똑같다. 축구도 마찬가지지만 한 명이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축구도 골 넣고 조직력 무너져서 골 주면 끝이다. 야구도 똑같다. 혼자 홈런 쳐도 에러(실책) 내면 몇 점 준다. 그 역할을 요소요소 잘 하도록 해주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그건 캠프 때부터 계획과 방향을 뚜렷하게 준다."(염경엽)
다시 시계를 돌려세웠다. 그 시절로 돌아갔다. 염 감독은 "나는 명보가 잘 될 줄 알았다. 한국 축구를 평정하고 이끌고 가겠구나 싶었다. 나는 서른 살 전과 후가 완전 다르다. 서른까지는 한량이었고, 그 이후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노력했다. 성공하기 위해서 그 누구보다 노력을 많이 했다. 서른 이후의 내 인생은 어떤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강조했다. '염갈량'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리스마의 대명사인 홍 감독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 나는 굉장히 섬세한 편이다. 내가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서툴러서 그렇지. 물론 화가 났을 때는 때려 잡을 때가 있지만 카리스마라는 어원이 하늘에서 주신 선물이다. 이건 배우려고 해도 안 된다. 공부해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카리스마 보여주려고 하면 더 망한다. 난 그냥 기본적으로 약간 있는거지 일부러 그렇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홍 감독의 오늘일 뿐이다.
홍 감독은 2022년 K리그를 첫 제패한 후 "어제 내린 눈이야, 보이지도 않아"라는 말로 화제를 뿌렸다. 2024년 새해 두 사령탑의 목표는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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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감독은 염 감독에게 배번 85번이 새겨진 2연패의 메시지를 담은 울산 유니폼을 선물했다. 염 감독은 LG 유니폼에 홍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 20번과 함께 이름을 새겼다. 그리고 3연패의 염원을 담았다. '왕조의 시작'은 첫 번째 우승, 2연패도 아니다. 3연패에서 시작된다. 두 사령탑의 도전이 새롭게 시작됐다.
정현석, 김성원, 김가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