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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를 떠난 후 2년이 흘렀지만, 선동열 전 감독은 팬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수 없는 야구인이다. 운동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보' 수식어를 얻은 최고 스타 출신 지도자. 프로야구 현장에서 비켜서 있지만, 선 전 감독은 한국야구의 자산이다.
지난 9일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만난 선 전 감독은 지난 2년간 많은 걸 느꼈다고 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그런지, 건강이 좋아졌다"며 웃었다.
그동안 제가 앞만 보고 달려왔잖아요. 쉴 시간이 없었고, 가족과 보낸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지난 2년간 못 해본 걸 많이 했습니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어요. 될 수 있으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했어요. 또 앞으로의 야구인생을 설계하고,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고민했어요. 많은 걸 느끼고 있습니다. 이전에 두 번 쉴 때는 이런 생각을 못 했거든요. 지난 시간을 돌아봤습니다. 10개 구단 감독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성적이 안 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요.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면 감독 못해요. 돌아보면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몸은 참 좋아요. 오늘도 운동을 좀 하고 왔어요.(웃음) 지난 달에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큰 이상이 없더라고요.
-얼마전 스포츠조선이 KBO리그 10개 구단 선수, 코칭스태프, 프런트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슬라이더는 역대 최고로 꼽혔는데, 직구는 오승환에 이어 2위였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조사결과인가요.
물론입니다. 삼성에 있을 때 제가 오승환을 뽑았어요. 승환이가 세계적인 마무리 투수가 됐는데, 따라갈 수 있나요.(웃음) 제가 선발을 많이 하다가 나중에 마무리를 해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승환이는 저보다 제구력이 좋고, 직구 회전력이 좋아요. 스타일은 조금 다르죠. 승환이는 위에서 아래로 던지는 유형인데, 저는 팔을 타자 앞으로 최대한 끌로나가 던지는 스타일이었으니까요. 승환이는 타자 앞에서 볼끝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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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역대 최고 투수를 얘기할 때 고 최동원 한화 이글스 2군 감독과 함께 거론됩니다. 누가 최고인가요.
제게는 우상이 있었습니다. (최)동원이형입니다. (고려대 1학년 때인)1981년 대표팀 상비군에 뽑혔는데, 최동원 김시진 임호균, 세 선배가 계셨어요. 연습할 때 이 분들이 던지는 걸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저렇게 던지나 감탄했어요. 그 때는 제가 나중에 잘 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미국, 일본, 대만을 상대로 던지면서 좋은 결과를 냈는데, 내 뒤에 형들이 있어서 가능했던거죠. '내가 안 좋으면 선배가 책임져주겠지' 그런 생각으로 던졌거든요. 그러면서 나중에 선배를 넘어서보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1985년 해태에 입단해 1986년 0점대 방어율(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잘 했어요. 당시 동원이 형이 6000만원이었나. 최고 연봉을 받았어요. 형을 앞서고 싶어 '동원이 형보다 1원이라고 더 받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우상이었고, 나중엔 라이벌같았지만 형이 있었기에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형이었는데,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셨어요. 살아계셨다면 훌륭한 지도자로 계셨을텐데….(선동열은 프로 2년차인 1986년 39경기에 등판해 262⅔이닝을 소화하면서 24승6패-평균자책점 0.99를 기록했다. 그해 19차례 완투했고, 완봉으로 8승을 거뒀다)
-선수 시절 가장 값진 기록이 꼽는다면 무엇이 될까요. 백인전 전 롯데 감독의 4할 타율과 함께 통산 평균자책점 1.20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0점대 방어율도 해봤지만, 가장 값진 것은 팀 우승입니다.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어요. 해태 소속으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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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선동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선수가 있었겠죠.
(장)효조형이 떠오르네요. 저랑 대결 성적은 안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공을 배트에 맞히는 컨택트 능력은 타고났어요. 1986년인가, 8회말 투아웃까지 퍼펙트로 가다가, 효조형한테 13,14구까지 가서 안타를 맞았어요. 첫 안타에 점수까지 내줘 2-2에서 연장까지 갔어요.(KBO 확인 결과 선동열은 1986년 5월 6일 대구시민구장에서 열린 삼성전에 선발 등판해 7회말 2사후 장효조에게 첫 안타를 내줬다. 연장 11회까지 접전끝에 완투승을 거뒀다) 그 다음은 이정훈(한화 스카우트 팀장)입니다. 웬만한 공은 전부 쳐냈어요. 참 까다로운 타자였죠. 사실 (이)만수형처럼 크게 치는 스타일은 오히려 편했어요. 짧게, 정교하게 치는 선수가 힘들었지. 요즘 타자들은 타격 기술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웨이트 트레이닝도 많이 하고, 선진야구를 많이 접하고 있고, 장비도 좋아졌잖아요. 반면에 투수의 구종은 예전보다 다양해졌지만, 제구력은 떨어진 것 같아요.(장효조는 선동열을 상대로 통산 41타수 6안타 타율 1할4푼6리-8볼넷-14삼진, 이정훈은 47타수 13안타 2할7푼7리-1볼넷-13삼진을 기록했다)
-해태 시절에 LG 트윈스 정삼흠과 밤새 술 마시고, 다음날 완봉승을 거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요즘엔 소주 1~2병 먹으면 취해요. 예전에 좀 마셨지요. 그 때는 소주 5~6병 정도 했어요. 뭐, 소주로 안 끝났지만.(웃음)술을 좋아해 요즘도 자주 마시지만, 먹더라도 탄수화물은 안 먹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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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도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었어요. 그 애기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데.(웃음)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하고 휴학계를 냈어요. 군대가려고요. (군팀인)경리단과 다 얘기가 돼 있었고요. 36개월 군 복무 마치고 나갈 생각이었죠. 그런데 안기부에서 집에 전화를 했어요. 학교 졸업하고 군대가라고요. 학교에 휴학계도 안 받아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도 없는 얘기죠. 그때 군대에 갔다와서 바로 (메이저리그에)갔어야 했는데…. 메이저리그에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경험을 못 해봐 잘 모르겠으나, 조금은 했겠죠.
-FA(자유계약선수) 몸값이 100억원까지 치솟았습니다. 전성기 때 성적으로 지금 FA가 됐다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요.
(잠시 미소를 머금고 생각하다가)100억원은 받지 않았을까요. 잘하면 150억, 200억원도 가능했을 거고.(웃음) 저희 때 FA가 있었다면, 술 안 마셨을 겁니다. 술 안 먹고 운동 더 열심히 했겠죠.(웃음)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