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자칫 양팀의 벤치에서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우르르 쏟아져 나올 수도 있었다. 다행히 '던진 이'가 미안하다는 제스추어를 취했고, '맞은 이'는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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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수의 신경전은 27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벌어졌다. 주중 3연전 중 두 번째 경기. 0-1로 뒤지던 4회초 KIA 공격 때였다. 선두타자 김원섭이 기습 번트를 시도했다 아웃된 후. 타석에 KIA 4번 브렛필이 나왔다. 배영수의 초구가 몸쪽으로 들어갔다. '볼'이 선언됐다. 2구째는 파울. 3구째 바깥쪽 커브에 헛스윙을 한 필은 4구째 직구에 선 채로 삼진을 당했다. 결과는 삼진이었지만, 배영수의 몸쪽으로 향한 초구는 무척 위협적이었다.
다음 타자는 최희섭. 볼카운트 1B1S에서 3구째가 엉덩이 아랫쪽 허벅지에 깨끗하게 맞았다. 최희섭은 잠시 뒤로 돌아 아픔과 짜증을 삭힌 뒤 1루로 뛰어나갔다. 2사 1루가 됐고, 이제 타석에 이범호가 나왔다. 연속 2개의 볼에 이어 3구째가 이범호의 옆구리에 꽂혔다.
이범호는 공에 맞는 순간 버럭 화를 내며 배트를 바닥에 던지고 마운드 쪽으로 나가려고 했다. 한화 포수 조인성이 즉각 이범호를 껴안으며 진정시켰고, 권영철 구심도 이범호의 팔을 잡고 자제를 유도했다. 배영수는 즉시 모자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냈다. 다행히 이범호는 화를 가라앉혔다. 덕아웃 앞쪽에 살짝 몰렸던 양팀 선수들도 차분히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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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일단 여기서 종료. 물증은 없지만, 배영수의 연속 사구는 정황상 고의성이 담겨있는 게 맞다고 봐야 한다. 프로야구의 특성, 팀워크를 이해하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행동이다. '우리 팀 선수의 피해를 대신 갚아준다'는 정서는 세계 어디서나 같다. 미국 MLB나 일본 NPB 그리고 KBO리그에서 다 통한다. 배영수는 한화의 팀 정서를 대변해 KIA 선수들을 기술적으로 맞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날 경기를 복기해봐야 한다. 전날 한화 전력의 핵심인 김경언이 1회말 KIA 선발 임준혁이 던진 공에 맞아 다쳤다. 단순 타박상인 줄 알았는데, 검진결과 오른쪽 종아리 좌상으로 치료에만 4주가 걸린다고 나왔다. 최소 한 달 정도는 쉬어야 하게 됐다. 한화로서는 너무나 뼈아픈 손실. 더구나 경기도 3대10으로 완패했다.
그런데 이날 또 한화 선수가 몸에 공을 맞았다. 그것도 전날 허리 통증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팀내 타율 1위 이용규였다. 0-1로 뒤진 3회말 1사 1, 3루때 타석에 나와 KIA 선발 김병현이 던진 공에 종아리쪽을 맞았다. 전날 김경언이 맞은 부위와 비슷하다. 점수 차와 경기 상황, 그리고 변화구였던 점을 고려하면 김병현의 사구는 실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도 어쨌든 한화 선수단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당히 나쁜 사구다. 또 다시 핵심전력을 잃을까봐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결국 곧바로 이어진 4회초에 선발 배영수가 이런 팀의 응축된 정서를 대변하는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배영수는 삼성 시절에도 이런 일을 도맡아했던 인물이다. 워낙 팀워크를 중요시하는 선수이기 때문. 또 이런 일이 벌어질 때 기술적으로 상대 선수가 최대한 다치지 않게 공을 던질 수 있는 배짱이 있다. 이범호를 위시한 KIA 선수단도 이런 팀 정서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기에 크게 분노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만약 최희섭-이범호의 사구가 악의적으로 머리쪽을 향했다거나 아니면 이 상황 이후 또 사구가 나왔다면 KIA 선수들도 즉각 행동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치고박는 난투전까지 번지지만 않는다면 이런 식의 미묘하고 복잡한 팀의 심리전 또한 프로야구의 또 다른 볼거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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